로마서 1장 16절 ~ 17절
16절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7절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목 : 로마서를 보는 두 가지 관점
로마서는 누구를 위하여 기록되었는가?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이 함께 있었는데, 두 집단 간에 갈등이 있었다. 믿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은 모든 것에서 자유할 것을 강조했다. 고기나 포도주 먹는 문제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대 로마 시장에 내놓은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거나 그 일부였다. 하지만 이방인 성도들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 진짜 신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할찌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특정한 날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필요했다. 성도들이 한데 모여 식탁 교제를 나누고 말씀을 듣는 일은 중요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이 굳이 안식일일 필요도 없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나 안식일에 합당한 의례를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취소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분명히 있었던 사건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성도들은 달랐다. 유대인들은 평생 지켰던 율법이 몸에 베여있었다. 그들에게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아직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과 동일한 일이었다. 예수님도 자신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강론 중 산상수훈은 구약의 율법이 밖에 드러난 행위만이 아니라 내면이나 행동의 동기까지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고기와 포도주를 즐기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시험에 빠졌다. 그러다가 클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 때문에 유대인 성도들은 로마 교회에서 떠나가게 되었다.
클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이전에는 로마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유대인 성도들이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 이후에는 로마 교회의 주류는 이방인 성도들이 되었다. 교회의 주요한 직분자들 중에 유대인이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로마 교회는 이방인 성도들의 믿음 양식대로 변했다. 얼마 뒤, 클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서, 죽은 황제의 추방령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로마 교회는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의 차이로 인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한 때 고린도에서 함께 사역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듣게 되었을 것이다. 로마 교회의 분열은 앞으로 있을 서바나 선교 여행에 악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였다. 로마 교회의 후원이 지금의 스페인 지역인 서바나로 가는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편지를 보내어 교회 안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한 방법은 정확하고 예리하게 복음을 서술하는 방법이었다. 복음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그래서 로마서를 해석하는 방식, 로마서를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관점이 제시되었다. 첫째는 로마서가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이다. 둘째는 로마서가 이방인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이다. 첫번째 관점이 개인주의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두번째 관점은 공동체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고 로마서를 읽을 때에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할지 생각해보며 하나님께서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길 원하시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 종교개혁적 접근
첫번째 관점은 구원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접근이다. 로마서를 인간 개인의 구원, 특히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서신으로 읽어내려가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접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의와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우리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로마서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6:6-7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칭의는 법정적인 개념이다. 단 한 번의 선언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다.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법정에 선 죄인을 보고 판결을 내리실 때에 의롭다 하고 선언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완전해진다거나 죄인 속에 의로움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칭해주셨다. 그 자체로 우리는 의롭게 되며 이 판결은 최후 심판까지 유효하다. 최후 심판 자리에서도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것이며, 다만 심판 받은 것은 상급의 수준일 것이다.
이방인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 바울을 보는 새관점
두번째 관점은 최근에 발견된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의 유대교 문헌들과 로마 교회의 자세한 상황들을 종합하여 나온 관점이다. 첫번째 관점이 개인 구원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1세기 로마 교회 안에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반성하여 나온 관점이다. 첫번째 관점의 핵심이 “어떻게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였다면, 두번째 관점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본 백성인 유대인들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두번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서가 이 질문에 답하는 서신서라고 말한다.
두번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1세기 당시 유대교에 대한 재평가 혹은 새관점을 제안한다. 유대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행하거나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에 머물기 위하여 율법을 행하거나 선한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메시야 되신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먼저 찾아와 구원하시는 은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언약적 신율주의 종교인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야를 만나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음을 믿는 기독교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표현을 통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유대인의 우선성을 해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원하는 마음에서 로마서를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 관점은 종교개혁자들이 율법주의적 종교로 전락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를 1세기 당시 유대교에 대입시키는 실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성도들에게도 유대인 성도들의 하나님의 첫 번째 백성인 유대인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편지를 기록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이라고 한다. 새 관점에서 칭의 즉,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두번째 관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첫번째 관점인 종교개혁적 관점의 한계로 우리는 로마서를 신학 논문으로 보게 했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1세기 로마 교회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 안에서 중대한 문제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를 무시하는 일은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는 데 있어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대인과 이방인 문제를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즉 구원의 보편성을 앞세우는 것보다 이신칭의의 결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함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전하려는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 모두에게 : 수정된 종교개혁적 접근
실제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에서 법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아무래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 자신이 편지를 작성할 때에 구약의 개념들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약 율법 상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은 재판장에 피고로 선 사람에게 그 사람이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인지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자인지를 판단할 때에 사용되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은 법정에 선 피고에게 내리는 선고이며, 선언이다.
출 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으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왕상 8: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대하 6:2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나 하는 이 두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사 5: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이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위에 언급된 모든 구약 본문은 법정에서 의인인지 악인인지를 판결하는 상황을 전제로 두고 있다. 법정에 선 피고에게 내려지는 선고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였을 때에, 우리는 오늘 읽었던 로마서 1장 16절에서 17절 말씀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16절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절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먼저 말한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 개개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믿는 자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도 구원이 있다. 물론 순서는 있다. 유대인이 먼저 믿었고 헬라인들이 뒤따라 믿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 순서이지 복음의 능력이나 구원의 우선성, 민족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믿지 않는 유대인은 어쩔 수 없이 복음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헬라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혈통적이나 민족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구원을 우선하여 생각하며 로마서를 읽어야 하지만, 새 관점의 유대교 이해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를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읽어가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로마서를 읽어가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저지른 잘못이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은 점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한다.
유대교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뿐만 아니라 율법의 준수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을 통해 구원의 과정을 통과하도록 협력해야 하고 인간은 충분히 협력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신인협력적 구원관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유대교는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택해야 하는 당연한 결과를 이해하지 못했다. 바울은 유대인 성도들이 아직도 유대교의 문제, 잘못된 믿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믿는 모든 자에게 적용되는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성도도 유대인 성도도 복음 앞에 동등함을 주장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그들을 의롭게 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 하고 강조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법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일어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구원의 복음을 온전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며 해결하고자 하였다. 구원의 복음, 그 중심에는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사 우리 하나하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계신다. 바울이 강조하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다. 우리는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려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로마서를 통하여 알아야 한다.
로마 교회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우리 또한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로마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우리의 구원은 로마서의 진술과 다르지 않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 받은 의로움 또한 우리에게 그대로 있다.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가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뤄진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찾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이 모든 것을 알아듣게 설명하시고 이 모든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하여 로마 교회와 사도 바울을 사용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로마서를 읽어야 한다.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혹시 로마서를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없거나 깨달음이 없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채워주실 것이고 체험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기도들을 되돌아보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었던 한 순간이라도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모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 주셔서 우리의 대답을 듣고 싶어하신다. 우리는 받은 받은 은혜대로 알려주신 사랑대로 들려주신 말대로 대답하면 된다. 로마서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간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 온전하고 순전한 복음을 다시 알려주어 다시 한 몸 되는 교회, 하나되는 교회를 지어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베풀수 있는 자들이 되길 소원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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