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9절~11절
9절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0절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절 :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제목 : 네가 보는 것
요한계시록을 읽는 방법
우리는 무언인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일 때, 선입견이라는 것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자체의 알 수 없는 말들이 많고, 환상과 예언이 가득하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신비롭고 위험한 책이다 라는 생각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내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다.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 해석 때문에 이단으로 판별된다. 대표적인 곳이 신천지이다. 내가 요한계시록을 읽다가 신천지처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항상 우리 옆에 도사리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이 무서운 일이고 꺼림칙한 일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상징이나 환상의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시려고 주신 말씀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지으시고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기 까지 사랑하는 삼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의 지혜와 인식의 범위 안에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다.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어떤 타자기나 연필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요한에게 전해졌고 사도 요한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언어적 배경까지 모조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기록자에게 주시고 기록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러주는 데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록자로 부른 그 사람의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로 하여금 잘 알아듣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실 때에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전 존재를 사용하신다. 그의 경험이나 생각, 학업 정도,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위치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사용하신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의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11절과 같이 사도 요한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그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11절 :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기록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재생해주시는 동영상을 보았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본 영상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도와 전달할 메시지를 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밧모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영화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사도 요한의 해박한 구약성경 지식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화에 담긴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19절 말씀이다.
19절 :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 요한이 보는 영화는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선입견을 가지고 보게 된다. 대략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번째 선입견은 과거주의적 관점, 두번째는 미래주의적 관점, 세번째는 이상주의적 관점이다. 하나씩 살펴보면서 우리가 가져야할 선입견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요한은 이루어진 사실을 보았을까? : 과거주의적 관점
첫번째 관점은 과거주의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도 요한이 처했던 상황에 집중하는 관점이다. 사도 요한은 분명히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4절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명확하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이 돌보던 교회에 꼭 필요한 내용들을 편지로 보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통상 3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견해는 로마 제국의 핍박 상황을 중요하게 본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인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다스렸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황제 숭배 문화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그 당시 기독교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아도 되는 공인된 종교가 아니였다.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많은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하여 이런 상황 중에서 로마에 의해 박해 받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하실 것이고 짐승인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는 멸망 당할 것이라고 용기를 준다고 본다.
두번째 견해는 이단적인 사상이 교회에 들어온 것을 중요하게 본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였던 일곱 교회에는 영지주의, 유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게 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교회가 로마 제국의 외적 핍박보다 이단에 의한 영적 핍박에 더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요한계시록을 읽은 성도들은 이단과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이 있는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생각한다.
세번째 견해는 요한계시록이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기록되어서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짐승은 로마 제국이며,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예루살렘을 파괴하러 오는 로마 장군들로 본다. 아마겟돈은 예루살렘 파괴를 위한 예루살렘 포위로 생각한다. 세번째 견해는 너무 이른 시기에 계시록이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고, 온 세계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계시록의 목적을 축소시켜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앞에 언급하였던 두 가지 견해도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어도 마지막 심판과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전체 말씀이 요한이 살았던 1세기에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과거주의적 해석은 문제가 많다.
요한은 미래를 보았을까? : 미래주의적 관점
두번째 관점은 미래주의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1장-3장, 4장- 22장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보고 1장에서 3장 말씀은 1세기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라고 보고 4장에서 22장은 역사의 끝에 일어날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관점이다. 미래주의적 관점에서도 강조점에 따라 두 가지의 견해가 존재한다.
첫번째 견해는 소위 세대주의적 관점이라고 불리는 견해이다. 인류의 전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고 세대에 따라 구원 계획을 가지고 실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교회 시대도 일곱개로 나눠진 세대 속에 한 세대이며, 이 시대는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 까지 잠시 이방인을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 끝에 교회는 휴거될 것이고 7년 환란기가 시작되고 그 환난 기간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 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계시록이 문자적으로 그러니까 기록된 표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견해이다.
두번째 견해는 전통적 전천년주의라고 불리는 견해이다. 세대주의자들과 비슷하지만 세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온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의 대부분을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천년주의자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많다.
미래주의적 관점도 약점이 존재한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시점인 1세기 교회에 대한 적용을 제거한다. 또 분명히 요한계시록은 1세기 당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일곱 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계시록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영화를 기록한 것인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에 대한 유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요한은 환상을 본 것일까? : 이상주의적 관점
사도 요한은 1세기 당시의 상황을 본 것만도 아니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미래를 본 것만도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다. 세번째 관점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것에 주목하는 이상주의적 관점이다. 이상주의적 관점은 말 그대로 계시록은 상징이 가득하다고 보고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계시록을 본다.
계시록은 교회 시대에 있는 하나님과 악 사이의 전쟁, 교회와 세상 사이의 전쟁에 관한 책이며, 계시록에 등장하는 각종 재앙들은 모든 시대에 있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환상은 전쟁 속에 있을 교회와 죄와 싸워야할 성도에게 주는 영적 진리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리켜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하고 성도 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계시록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승리를 분명히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계시록을 통해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행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 분명히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이상주의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 일들 또한 영적 진리를 전해주기 위한 상징일 뿐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이 때까지 요한계시록을 보는 세 가지 관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어느 것이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요한계시록을 보아야할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의 문맥,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최대한 올바르게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사전에 어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읽어나가서는 요한계시록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이 1세기의 교회나 그 시대의 사건을 바탕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렇게 이해해야 하고 마지막 종말의 때를 말하면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마지막 심판 이후에 있을 일에 대해 말한다면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한 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찬찬히 따라가야 한다. 어떤 표현이나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문맥을 잘 살피고 어느 것이 타당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요한은 편지를 쓰고 있다.
사도 요한은 걱정과 염려 그리고 사랑을 담아 자신 없이 남겨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다. 우리는 이 편지가 먼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 없이 남겨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자들에게 사도 요한은 사랑과 존경심을 담아 편지를 띄웠다. 한 시라도 보고 싶은 성도들의 얼굴을 그리며 사도 요한은 편지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사랑을 담아 이 편지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명확하게 편지로 기록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해석이 맞다고 네 해석은 틀렸다고 하면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 요한의 친절하고 사랑이 듬뿍 담긴 문장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 그것을 위해 인내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 편지를 받아든 일곱 교회와 동일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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