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1절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하신 것이라2절 :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절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우리의 현실)
우리가 이렇게 조심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드는 재난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조심하고 있고 어느 때보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스크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이 살고 있고, 손소독제가 없이는 손을 씻어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왠만하면 나가지 않고 꼭 필요하면 택배로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개강은 미루어졌고 미뤄진 개강도 재택 수업으로 면대면 수업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예배를 방송 예배로 대체하기도 하고 자체적인 가정예배로 주일예배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코로나-19만이 아니라 전염병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사스, 메르스 뿐만 아니라 구제역, 아프리카 돼지 열병, 조류독감 등 매년 방역전쟁을 치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습니다. 살처분 된 가축들의 시체가 빼곡히 세워져있는 모습, 그것을 파묻는 사람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농민들의 눈빛들. 우리에게는 코로나-19가 우리의 생활과 일상을 방해하기에,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언론에 부각되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염병이 일상이었던 나날들을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언제 이렇게 조심하고 애썼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때까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우리 일상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 속에서 보도되는 일들이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스크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 현실에 부딪칠 때, 재난 문자에 내가 다녔던 가게나 장소들의 이름이 나올 때, 우리는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염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조심하면 괜찮았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조심한 적이 있었나 하고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않고 물어봐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31번 확진자가 나오기 전만 해도 우리는 한국이 더 이상 코로나-19에게 위협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확진자가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정부가 전염병의 경로를 모두 차단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31번 확진자가 나오고 난 뒤로는 초비상 상태가 되었습니다. 네 자리 수의 확진자, 중국에 이어 최근까지 두 번째로 확진자가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심하고 신경쓰던 곳이 아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전파되고 전체 확진자 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검사와 방역을 철저히 했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금 더 조심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많은 후회들과 비판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과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히 코로나-19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31번 확진자의 등장으로 한 도시 전체는 전염병으로 인한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착각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고려하여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교만하기 까지 하여서 자기 생각, 자기 관점, 자기 주장만에 더 기울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시험 속에도 교훈을 찾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모이지 못하는 교회, 모이지 못하는 우리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왔고, 이 재앙은 우리의 어떤 능력으로도 제어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면대 면으로 만나는 일을 줄이고 개강을 늦추었으며, 최대한 나가지 않고 나가더라도 마스크를 꼭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온유한 큰 모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안전과 평판을 위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이 모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날이 따뜻해지고 습도가 올라가면 바이러스 활동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 하지만 사실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4월부터 실질적으로 개강을 하게 되지만 4월에는 얼마나 괜찮아질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막상 개강한다고 하더라도 학교 측에서 수업 이외의 동아리 모임에 대해 얼마나 좋게 생각할지는 의문입니다.
최근 두 주에 걸쳐서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방송 예배나 가정 예배로 대체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지 못하는 슬픔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주일이 주일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온유한 큰모임에 참여한 여러분들도 사실 다함께 모여서 다른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찬양도 자유롭게 기도도 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지만 그래도 막상 교회당 건물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피부로 와닿게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상황)
사도의 부재
오늘 읽었던 성경 말씀 속에도 우리처럼 외부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모임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계시록의 첫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이 개척하였던 아시아 주에 있던 교회 교회, 즉 에베소를 중심으로 하는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도시에 있던 교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원래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가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아시아 주에서 교회를 돌보던 디모데가 떠난 후에 에베소로 왔습니다. 디모데는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의 요청에 따라 사도 바울에게로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피땀을 흘리며 가꾼 교회를 잘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주의 총독의 눈에 띄게 되었고 총독의 상관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사도 요한을 밧모 섬이라는 지중해의 한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와 그 외 6개 교회들은 사도 요한의 유배를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고 사도 요한은 거의 마지막 남은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없으면 교회는 힘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이 없다고 해서 에베소와 다른 6개의 교회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기준으로 보아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처음 방문한 후 40년이 지났습니다. 교회가 설립된지 4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험한 일도 힘든 일도 함께 견뎌온 성도들이 끈끈하게 한 몸을 이루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다가 교회 가운데에는 장로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잡힐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에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 정도면 사도 바울이 마음 놓고 교회를 부탁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교회들은 사도 요한의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당하는 성도들
교회는 황제숭배 의식에 참여하도록 강요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첫번째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부터 로마 황제를 국신, 즉 국가의 신으로 추앙하는 전통을 생겼습니다. 두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높임받은 자라는 뜻으로 인간을 초월하였다는 의미 즉, 신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그 뒤에 들어서는 황제들도 자신을 신격화하여 통치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황제숭배가 공적인 국가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죽은 황제를 기리기 위한 의미로 황제숭배가 이루어졌지만 점차 살아 있는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있던 아시아 주는 황제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와 서머나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에베소에도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위한 거대한 동상이 에베소 항구 입구에 세워졌습니다. 에베소와 버가모와 라오디게아와 두아디라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이 도시에서 황제숭배가 행해졌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 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서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우리의 주님과 하나님으로 부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주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 말을 차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주님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사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떠나온 자리에서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성도들
황제숭배에 참가하는 일은 분명히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며,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순간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이 상당하였습니다.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일은 황제 스스로 하지는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황제 숭배 의식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끌어들여야 했던 지방 총독들과 상인들에게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지방 총독들은 눈에 가시인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간단한 그리스도인 재판 절차를 만들어 그리스도인일 경우 처형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만들었습니다. 총 세 가지 요구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요구를 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묻고 만약 예라고 대답할 경우 즉시 처형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요구는 로마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요구는 황제의 동상 앞에서 향과 포도주를 가지고 기도할 것이었습니다. 셋째 요구는 그리스도를 저주할 것이었습니다. 이런 간단한 재판 절차로 그리스도인들은 처형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며 쉽게 넘어질만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허용된 종교였던 유대교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허용된 종교라는 의미는 자유롭게 회당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숭배 의식에도 면제 받을 수 있는 종교를 말합니다. 유대교는 허용된 종교였기 때문에 황제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처형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니골라 당의 꾀임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유대교의 교훈을 따르는 이단 무리였습니다.
(성경의 해결)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사도 요한을 포함하여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는 환난 중에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환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신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함께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계시라는 말은 베일을 벗겨내듯이 여태까지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환란의 때를 지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에 닥친 고난의 시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뜻을 사도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알게 하시고 그 종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그 직분을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를 포함한 그 종들을 위하여 일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의 계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신 모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말은 지체 없이 이루어질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역사와 자연은 지체 없이 어느 것이 끝이고 시작인지 모를 만큼 지체없이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 만사가 돌아가는 것을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은 이렇게 지체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뜻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편지로 보냅니다. 교회를 돌보아야할 사도가 멀리 섬으로 유배당하고 황제숭배를 강요당하여 정상적인 모임을 지속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글로 적어 편지로 전합니다. 마치 지금 큰모임을 갖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영상을 인터넷을 통해 송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처럼 사도 요한도 함께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편지를 보내며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아시고 사도 요한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2절과 같이 말합니다.
2절 :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다른 어떤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이었지만, 사도 요한 자신에게도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밧모 섬에서 평생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를 보지 못하고 죽어갈 수도 있던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한 충실한 증인이기도 했지만 자기 스스로도 말씀과 증거를 받는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환란의 상황 가운데 위로를 얻을 만한 승리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
요한계시록은 그래서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있는 일은 2장과 3장에 걸쳐서 나오는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내는 교회들의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장차 있을 일들은 4장 이후에 나오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장차 있을 일들은 사도 요한의 때로부터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들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말씀은 연대기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둔한 인간의 지각으로 판단하는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러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할 것인데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이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으로 살아가야 할지 가르치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싸움
장차 일어날 일을 요약하자면, 교회와 세상이 어떤 영적 싸움을 싸우는 가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어떤 환란과 핍박을 당하며 세상은 교회를 어떤 방법으로 미혹하고 탄압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장대한 이야기 가운데 세상은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넘어지게도록 노력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합니다. 모임을 해제 시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죽임을 당하여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끝내 승리하는 교회
세상이 교회를 이긴 듯 보이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께서 끝내 승리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이심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승리한 듯 보였던 세상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큰 성 바벨론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큰 것을 자랑하며 부귀와 사치를 누리며 성도를 탄압하고 박해하던 큰 성 바벨론은 단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합당한 것으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인내
요한계시록을 읽었던 성도들은 환란의 순간에서도 승리의 확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끝내 승리하시고 이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진 교회는 큰 성 바벨론에 대항하여 죄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죄에서 멀리 떨어지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던 아시아 주의 성도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사도의 교훈입니다.
(우리의 해결)
특별하지 않은 상황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시대와 지금 이 시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인은 다르지만 현상은 비슷합니다. 모임을 피해야 하는 상황들, 모임을 하지 못하기에 조금은 멀어져 버린 형제들. 불안과 걱정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들.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모든 상황들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계시라는 수단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워진 이 천년의 시간 가운데 동일하게 신실하게 일하여 주셨습니다. 핍박과 박해의 시대에도, 이단과의 처절한 사투의 시대에도, 개혁의 불꽃이 타오르는 시대에도, 선교와 열정이 가득하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셨고 믿음을 공급하셨으며 인내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동일하게 일하여 주십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이 돌보던 교회와 멀리 떨어졌을 때, 편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때에는 이렇게 인터넷이라는 유용한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복음, 기록된 말씀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며 기술이 변하고 라이프 스타일이 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일하여 주십니다. 본문 3절 말씀입니다.
3절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예언의 말씀,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그 시대, 사도 요한의 때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 때가 가까워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 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이 천년이 흐른 시점에서 더욱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아침에 해가 떠오르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정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요구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지키셨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보다 더 큰 의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에 대한 사죄를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입으사 장차 우리의 심판주가 되어 주십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상에 일어난 일이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를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마침내 성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으로 우리에게 일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므로 말씀이라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나 함께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