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6일 월요일

로마서의 대략적인 줄거리 (로마서 1장 9절 ~ 10절 / 20.04.06)

로마서 1장 9절 ~ 10절

9절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절 :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제목 : 로마서의 대략적인 줄거리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다.


로마서는 성경 이전에 편지이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낼 만한 상황에 있었고 로마 교회 또한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받을 만한 상황에 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이 있던 시대에 편지를 보낸다는 의미는 지금의 전화 한 통이나 문자 한 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요도를 가진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중요한 요청을 전하고 선교사로서의 자신을 소개하며, 교회 안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언을 위하여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일정한 서식이 있어 일정한 순서를 따라 격식에 맞추어 기록한다. 문안인사와 감사, 서신의 본론, 권면과 작별인사로 끝맺는다. 또한 로마서는 수사학적으로 디아트리베 양식을 사용하였다. 상상 속의 대화 상대가 잠재적으로 반대할 것을 가정하고 대답하는 양식으로 편지를 작성하였다. 그래서 로마서는 모호한 구조와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명확한 구조로 기록된 성경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명확하고 정돈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 교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고, 로마 교회는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같이 교회를 뒤흔드는 시급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편지에도 줄거리가 있다.


편지라는 것은 항상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이야기를 품고 있다.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부터 시작하여 편지 자체의 이야기와 그 편지 이후의 이야기가 편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이다.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저번에 다루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편지에 기록된 편지 자체의 내용에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서는 형식과 격식이 잘 갖추어진 서신이기 때문에 편지의 부분이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부분인지 파악하기 쉽다.

편지의 목적을 파악하면 편지의 줄거리를 파악하기 더 쉬워진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논리적이고 직관적으로 글을 배열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낸 첫번째 이유는 서바나 선교를 위한 파송 요청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에게 주신 복음을 온전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로마 교회 내에 있는 유대 신자와 이방 신자 사이의 불화 혹은 갈등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온전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될 수 있도록 권면을 아끼지 않는다.

로마서의 전체 줄거리


사도 바울은 자신의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모두 믿음이라는 오직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 아래 놓인 비참한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떠나 죄 아래에 있는 비참한 인간의 현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같은 현실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에 이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비참한 모든 인간의 현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 방법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구원 때문에 성도는 거룩한 삶과 서로를 받고 세우는 공동체적인 삶, 교회로 설 수 있다. 로마서는 모든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에 이르는 복음의 부요하고 빛나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앞서 이야기 했던 대략적인 이야기를 로마서 본문과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1-17 인사와 주제의 도입
1:18-3:20 죄 아래 놓인 비참한 인간의 보편성
3:21-4:25 의롭게 됨의 새로운 보편적 길
5:1-8:39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의의 삶
9:1-11:36 하나님의 자비의 부요를 이루는 그의 경륜
12:1-15:13 의롭게 된 자의 순종의 삶
15:14-16:27 선교 협력과 기도 요청, 서신의 종결

로마서의 중요한 흐름들을 품고 있는 단락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로마서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죄의 보편성(1:18-3:20)


첫번째 단락은 죄의 보편성을 다루는 단락이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감각 기관을 무너뜨리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게 만들었다. 특히,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왜곡하는 인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속성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거나, 피조물을 창조주이신 하나님 보다 높이거나 같은 위치로 보기도 한다. 결국은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무시하며 역리,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죄악을 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죄 아래 있는 인간과 같게 하지 않으시려고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함께 섬기거나 아예 우상만 섬기는 행태를 보였다. 결국 죄를 분별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지만 유대인들은 더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지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유대인이나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나 죄를 행하는 면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죄 아래 놓인 모든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비참함이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로운 길(3:21-4:25)


율법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실패하면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옛부터 주신 말씀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성취된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지키시는 의로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의 원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체험하였던 일이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할 뿐,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의 본성이 죄로 인하여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시험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없으며, 언제든지 죄 짓기를 궁리하는 아주 비참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를 의롭다고 무죄하다고 선고하신다.

율법 아래에서의 곤궁과 성령으로의 삶(7:1-8:30)


로마서 7장은 율법 아래에 놓인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경험을 ‘나’ 라는 일인칭 단수로 이야기 한다. 성령 하나님 없이 율법을 받아든 유대인들은 옛 자아인 육신과 죄가 지배하는 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자리 걸음만 될 뿐이다. 율법의 요구는 다다를 수 없는 높이와 깊이와 너비를 가졌다. 결국 사도 바울이 탄식하는 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외칠 수 밖에 없다.

성령 하나님 없이는 옛 사람에서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우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신 뒤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셔서 율법이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시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옛 자아와 육신에 사로 잡힌 자가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영의 생각을 가진다는 의미는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이끌어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11:1-36)


이방인 신자의 증가가 유대인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하나님 백성으로 택하셨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하나님 백성 삼으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택하셨다. 결코 그들의 공로나 특별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으셨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이방인은 결코 교만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여 떨어져 나간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어떤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의 갈등과 문제 해결의 길(14:1-15:13)


사도 바울은 이번 단락에서 로마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유대인 신자들은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먹지 못하는지, 어떤 날을 지켜야하고 어떤 날은 지키지 말아야 할지 등등 모든 것에 율법과 같은 잣대를 대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의 행동을 한심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갈등은 깊어져 가서 멀리서 사역하고 있던 바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갈등하고 있는 두 그룹에게 먹을 것의 기준, 안식일의 기준 보다 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너를 받으신 것과 같이 그도 받으셨다는 사실과 두번째는 우리 모두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 관점에서 서로를 볼 때에 믿음이 약한 자나 믿음이 강한 자나 서로를 한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 이라고 말씀한다(롬 14:17). 서로를 판단하는 것보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 사랑을 향하여


전체적인 로마서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로마서는 1세기 당시, 사도 바울과 로마 교회의 특수한 상황과 필요에 의해서 기록된 편지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를 통하여 교회 안에 차별과 차등이 없음을 이야기 하신다. 그 이전에 모든 인류,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동일한 비참함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하심이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죄로 인해 비참하기 그지 없던 우리를 받아주셨다. 나, 우리뿐만 아니라 너, 너희, 그, 그들까지 받아주셧다. 그리고 받아주신 모두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다.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과 사랑이 우리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신다.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다.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이 고민과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또한 믿음의 형제 자매와의 관계가 발전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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