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0일 월요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요한계시록 3장 22절 / 20.04.21)


요한계시록 3장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제목 :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에는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1장 말미에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라 명령하신 명령을 따라 작성된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특별히 선택된 교회이기도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을 상징하거나 교회의 유형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교회가 아닙니다. 단지 사도 요한이 돌보던 아시아 주의 일곱 교회를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때에 이해하며 그리고 사랑을 담아 편지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 3장의 말씀은 실제 역사 가운데 존재한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는 의미는 단지 그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 한 머리에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느 한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도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며 우리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말씀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곰곰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씀을 주신 그 목적과 의도대로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에는 일정한 반복 구조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교회의 사자는 교회를 대표하고 섬기는 자 입니다. 만약 교회의 사자가 천사라면 예수님께서는 천사에게 칭찬하거나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편지하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영광스럽게 묘사되며 교회의 상황에 맞게 위로가 되며 힘이 될 수 있는 위엄있고 능력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세 번째는 칭찬입니다. 교회가 잘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네 번째는 책망입니다. 교회가 잘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실 복에 대해서 약속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선포하시므로 일곱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도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반복 구조가 일곱 교회마다 반복됩니다. 그러나 각 교회가 처한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각 교회의 내용은 달라집니다. 이제 한 교회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


2장 1절부터 7절까지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아시아 주의 최대 도시였습니다. 인구가 당시 25만 명이었습니다. 아시아 주의 중심도시는 버가모였지만 에베소가 아시아 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대도시 위주로 선교활동을 펼쳤던 사도 바울도 아시아 주 선교를 에베소에 거점을 두고 선교하였습니다. 에베소는 로마 제국에 대하여 자치권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잘 보여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밉보이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지켜온 자치권을 빼앗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베소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우상숭배 문화가 만연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에베소에서 선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던 사도 바울도 아르테미스 여신의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그 뒤 에베소에는 디모데가 사역을 하다가 사도 요한이 맡게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1장에서도 예수님은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셨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키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일곱 교회를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자라는 사실을 에베소 교회에게 알려주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을 잘 막아내었다고 칭찬 받습니다. 가르침 받은 대로 잘 살아내는 것을 칭찬 받고 있습니다.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크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이단은 버가모 교회에도 들어온 니골라 당으로 보입니다. 니골라 당은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이 성도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하도록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에게 전해들은 복음으로 그들을 분별하고 쫓아내어 진리를 지켜내었습니다.

칭찬에 이어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책망을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을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습니다. 이단을 분별하고 예수님께 게으르지 않은 것을 볼 때에 하나님 사랑은 변한 것이 없지만,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형제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형제들을 일단 거짓 선지자인지를 의심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신경이 곤두서서 의심하였고 에베소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에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곰곰히 생각하고 단호하게 회개하며 돌아서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부르시는 예수님은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촛대를 옮겨 버리면 옮겨버린 촛대에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거니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책망에만 그치지 않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이기는 자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는 자입니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약속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가리킵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영생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


에베소 교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인구는 20만 정도로 에베소 만큼은 아니지만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이 도시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를 배반하지 않고 영원히 충성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만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의 수제자였던 폴리갑이 사역하면서 순교당한 교회 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하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말씀하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1장에 나왔던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표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정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긴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요구가 결코 가혹하거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에도 부유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많이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당시 로마의 공인된 종교로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공인된 종교도 아니였고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황제 숭배 의식을 피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하고 유대교로 그리스도인을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관원들에게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발을 일삼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탄의 회당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장차 올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마귀가 서머나 교회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두도록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난은 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십 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환난이 실제로 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길지 않은 시간동안 환난이 지속될 것이다. 끝이 있는 환난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십 일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명령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하시기에 정당하고 어렵지 않은 명령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죽음 조차도 두렵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의 의미는 양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돈이나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에 생명의 관을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십니다. 생명의 관은 영생을 가리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지옥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죽음 이후 심판을 위하여 첫째 부활을 한 이후, 죄인들이 받게 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버가모 교회


서머나 교회를 이어서 버가모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편지하라 명령하십니다. 버가모는 아시아 주의 수도입니다. 양피지를 생산하는 도시였으며, 도시에서 생산된 양피지를 이용하여 거대한 도서관이 있던 도시로 전해집니다. 우상숭배에 특출한 도시였습니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제우스, 아테나를 섬기던 고시었습니다. 또한 황제 숭배도 성행했던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에는 힘든 도시였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로 나타십니다. 이는 버가모에 머물고 있던 로마 총독의 모습과 비교됩니다. 로마 총독은 식민지 도시민들에게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자기들끼리 재판하고 때리고 묶고 모욕하고 다했지만 정작 십자가에 매달 권리가 없어서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갑니다. 이처럼 로마 총독은 로마법에 따라 식민지민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검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버가모에는 사탄의 권좌가 있습니다. 사탄의 보좌가 로마 총독의 자리를 뜻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설명하였듯이 버가모는 온갖 우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제우스, 아테나, 로마 황제까지 온갖 잡다한 우상을 섬기던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사탄의 권좌 가운데에서 충성된 증인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에도 안디바를 포함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머나 교회에게 요구하였던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을 몸소 보여준 모습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께 충성을 다했지만 몇가지 책망 받을 것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에베소 교회에도 들어왔으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거짓 선지자로 분별하여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니골라 당이 거짓 교훈을 전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행음은 영적인 행음 뿐만 아니라 육적인 행음 또한 포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버가모는 우상숭배의 음란한 문화가 널리 퍼져있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이 회개는 우상숭배에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 뿐만 아니라 죄된 행동을 뉘우치고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를 하지 않으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벌하실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도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 환난과 핍박을 견디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추었던 만나가 가리키는 것은 구약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결과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과 영생을 가리킵니다. 흰 돌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로마 황제들은 흰 돌을 나눠주어서 정기적인 옥수수 배급을 받을 수 있는 표식으로 사용하였기도 했고, 검투사가 자유를 얻을 때에 흰 돌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배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흰 돌은 정결함과 자유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흰 돌에 새 이름을 기록하신다고 하십니다. 완전히 새롭게 된 승리한 자의 이름을 새길 것이며 이것은 비밀이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이기는 자에게는 평안과 영생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 교회를 이어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편지하라고 하십니다. 두아디라는 내륙 도시로 퇴역 군인들이 세운 도시입니다. 공업과 상업이 발달되어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동업조합이 발달하였는데, 동업조합에 들지 않고는 아무리 잘 만든 물건이라도 시장에서 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동업조합에 들어가길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각 동업조합에는 수호신을 지정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동업조합에 들어가는 것은 수호신을 섬기는 일과 같았고 동업조합에 들어가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아주 힘든 상황에서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살펴주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불곷 같은 눈으로 자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성도들을 바라보시고 보살피십니다.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견고하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 것 보다 나중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와는 정반대의 칭찬입니다. 사실 두아디라 교회가 더 많아진 것은 사랑과 믿음, 섬김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의미이고 그 기회들 가운데 정말로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풍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업이라는 말과 행위라는 말이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사랑과 믿음, 섬김의 마음을 베풀만한 기회가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프로그램이 많고 잘 되어있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책망받을 것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받아들인 일입니다. 이세벨은 실제 사람의 이름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옛날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의 이름이었고 그 때 이세벨 왕비가 북이스라엘에 행한 것과 같이 두아디라 교회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기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지자에게 이세벨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경고하십니다. 침상에 던지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이것은 병들어서 침대에 눕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간음하는 자들에게는 큰 환난 가운데 던지며 그의 자녀를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죄를 숨긴다고 할지라도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리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약속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고 죄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세벨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얕은 지식이라고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어떤 깊은 지식이라 자랑하기 위하여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을 쫓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받은 복음을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까지 굳게 잡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과 환난을 견디어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 받아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별을 받을 것입니다. 새벽 별처럼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나눠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사데 교회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이어 사데 교회에 편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데는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에서 소아시아에 이르는 도로의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교통의 요지이며 로마의 동방무역에 중요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염색 기술이 발전하였으며 모직 제품을 생산하여 염색하는 사업이 많이 발달되어 있는 도시였습니다.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과 일곱 교회의 사자를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스스로 자유하시며 예수님은 성령님을 아래에 두고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스릴 때에 성자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몸의 영이 되셔서 머리의 뜻과 말씀을 교회에게 전합니다. 교회를 다스리는데 협력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칭찬이 없고 바로 책망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상태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속은 이미 죽어서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외적 모임이나 행사는 있으나 그 모임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성도간의 사랑이나 성령의 능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과 일을 통해서 사랑과 섬김과 믿음을 표현하였지만 사데 교회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처음으로 돌아가 교회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해내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을 때에 기쁨을 회복하라는 말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도둑같이 오셔서 사데 교회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은 상황의 사데 교회였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가 몇 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닐 만큼 정결한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입힐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여 주십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끝내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한 것을 강조하여 알려주십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사데를 거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빌라델비아는 로마 우편 도로가 페르시아를 향하는 시작으로 동쪽의 문이라고 불리던 도시 입니다. 포도 재배가 주 산업이었고 포도주의 신 디오니수스 등 그리스 신들을 잘 섬기던 도시였습니다. 빌라델비아의 별명이 작은 아테네였으니 얼마나 그리스 신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편지하라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묘사합니다. 다윗의 열쇠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가진 열쇠 입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것에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되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으로 판결하시고 그 심판을 뒤집을 자가 없으신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열린 문을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핍박과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상급 몇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 번째는 열린 문을 두셨다는 말은 복음 전파의 문을 열어두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빌라델비아 교회에 계속 보내겠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두 번째는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들 중에 몇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이로서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세 번째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시험의 때에 함께 하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을 가리키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심판이 아니라 아시아 주 전체에 임박한 핍박과 환난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굳게 잡아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험을 견디어 이겨 이미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구원이 확실하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여 확실한 소유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은행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검은 양모 제품을 만들어 그 당시 유명한 겉옷을 만드는 도시였습니다. 의학학교가 있었고 귀에 바르는 약과 안약을 만드는 사업도 발달되어 있던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에바브라가 교회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충성되게 참되게 증거했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권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교만함과 영적 나태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책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의 온천과 골로새의 찬물이 흘러들어오는 도시였습니다. 모두 라오디게아와 거리가 좀 있는 도시들이었기 때문에 라오디게아까지 물이 흘러오면 미지근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상황에 맞추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정을 설명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대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되어 버린다면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자신을 부자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과 착각에 빠진 교만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진짜 옷을 사서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치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자신을 보고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책망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책망하고 징계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열심을 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문을 열 때까지 두드려 주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친밀한 교제를 즐기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히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길 때에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에게도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눠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한 자리에 앉아 친밀한 교제를 나눌 것을 약속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요한계시록 1장의 내용은 일곱 교회와 더 나아가서 이 편지를 읽게 될 많은 다른 교회를 향한 인사와 이 편지에 대한 소개였다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밧모 섬으로 오기 전에 일곱 교회를 목회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각각 자신들의 사정과 형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칭찬하고 세워주고 권면하고 질책하며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라 이야기 합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고 칭찬과 질책을 동시에 받은 교회도 있으며 질책만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칭찬을 받든 야단을 듣든 모든 교회에게 자신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시고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 또한 하나님을 충성되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상호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시므로 우리 또한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신다고 약속하시며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한 칭찬의 중심 내용은 이단과 핍박과 어떤 믿음이 흔들리만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안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말이 끝나는 3장 이후 4장부터 환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환난에는 끝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에는 끝이 있고 끝까지 견디면 그 뒤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그 약속을 의지하며 견디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사항이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내용입니다. 칭찬의 이면에는 주님께서 시험의 때에 교회를 친히 지켜주셔서 넘어지지 않고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함께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비슷하게 교회들을 향한 책망과 징계의 중심 내용은 처음 받은 믿음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믿음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다양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 형제들 사이의 사랑이 식었고,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고,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나 이세벨을 받아드렸고 사데 교회는 겉으로는 믿으나 속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의 물질적 풍족함으로 믿음의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않는 것은 다가올 환난 날에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뜻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지만 항상 약속하여 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책망과 징계는 더욱 성장한 믿음을 위한 것이지 그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책망 받은 교회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환난 날에도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길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길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이나 내부적인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전하여준 그대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는 방법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믿음 없을 보지 않으시고 함께 하여 주시는, 견디도록 힘주시고 위로하시며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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