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3일 월요일

세 종류의 제물 (로마서 3장 25절,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 15장 16절 / 20.04.13)




* 이 글은 로마서에 나타난 3가지 유형의 '제물'에 관한 연구 (롬 3:25; 12:1; 15:16), 권해생, 교회와 문화 34권 (2015): 31-45 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위 글의 원본이 궁금하신 분들은 한국성경신학회 교회와 문화 원문서비스(http://kbts.kr/html/sub3_01.html) 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5장 16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목 : 세 종류의 제물


사도 바울은 제사장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한다.

1절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택정함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의미는 구별하여 거룩하게 한다는 구약 제사법의 기본과 통하는 말이다. 택정하다라는 단어는 희생 제물을 구별하거나, 제사장을 구별하거나, 처음 난 것을 구별할 때에 사용된다. 바울은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 속에서 자신이 희생 제물로 택정을 받았거나 혹은 제사장으로 택정을 받았다거나 혹은 처음 난 것으로 택정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어떤 종류로 택정하셨는지는 로마서 15장 16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16절 :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는 1장 1절의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이에 따라서 사도 바울은 택정함을 받는 세 가지 대상 중 제사장으로 택정함을 받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택정함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제사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사에 관련된 규정들, 생활과 도덕적인 면에서 백성들이 지켜야할 율법들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가르치고 그들이 다른 이방 신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시대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인식을 잘 나타내는 것이 로마서에 나타나는 세 종류의 제물이다. 세 종류의 제물은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세 종류의 제물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로마서의 의미를 더욱 살펴보도록 하자.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제물은 화목제물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 말하는 로마서 3장 25절에 등장한다.

25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말에 대해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죄를 없애주는 정결적 속죄를 위한 제물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70인경이라고 하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에 따르면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되는 말의 어근이 정결, 용서, 긍휼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도 용서와 정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는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죄와 함께 사용되었고 요한일서 본문과 마찬가지로 죄를 정결하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죄를 없애주는 제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관계적 개념 안에서 유화적 속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신구약 중간기에 기록되었던 외경들과 유대교 문헌들을 보면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되는 말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기 위한 대속적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등장한다.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의 과정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제물이라고 판단하기는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70인경에도 관계 유화를 위한 속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서 3장의 문맥 상 하나님의 진노가 배경이 되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속죄일 의식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식이였기 때문에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유화적 속죄 제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말이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와 연관되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대속죄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70인경에는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 자체가 28번 등장하는데, 그 중 21번이 속죄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속죄소의 역할을 제대로 하셨다. 대속죄일 때에 제사장들은 속죄소에 제물의 피를 뿌린다. 예수님은 스스로 속죄소가 되시고 스스로 피를 뿌려 하나님께서 속죄소에 임하시도록 하셨다. 백성의 죄로 인하여 떠나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속죄소의 역할을 톡톡히 하시므로 오래전 레위 제사장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다.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해석을 버릴 수 없다.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이루어 졌는지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하셨다. 로마서 1장은 보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 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진노를 받으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정결하게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에 정결하게 되듯 우리도 예수님의 단 한번의 피흘림으로 더러운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대속하며,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다시 로마서 3장 25절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25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피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고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나는 정의로우심과 그의 백성을 그의 말씀대로 구원하시는 신실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 두가지 의미를 다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나는 정의로움이 이루어졌고,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결하게 되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동시에 드러내셨다. 정의와 사랑이 동시에 우리에게 베풀어졌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의 무한한 정의와 사랑을 알아듣기 쉽도록 가르쳐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산 제물이 되는 우리


두 번째 제물 유형은 12장 1절에 등장한다.

1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한 산 제물이 두 번째 제물 유형이다. 제물이라는 것은 죽음을 항상 포함한다. 그러나 12장 1절은 ‘산 제물’을 이야기 한다. 산 제물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2장 1절은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구절이다. 11장까지 교리적인 설명을 마치고 12장부터 본격적인 권면에 들어간다. 1장 부터 11장까지는 12장 이후 권면을 위한 근거 제시, 당위성 피력이라고 볼 수 있다. 12장 1절이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12장 1절에 등장하는 ‘산 제물’ 의 의미를 찾기 위한 조사를 위하여 12장 1절의 ‘그러므로’ 가 어떤 단락과 긴밀하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한다. 단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후에 간단히 자신이 근거와 당위성으로 제시한 글을 명사구로 요약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은 바로 앞에 9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 9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11장 33절에서 36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자비하심, 긍휼하심으로 요약한다. 9장 15절에서 18절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구원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부터 시작된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후, 그 구원을 받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권면하기 위하여 12장 1절 말씀을 시작하려고 한다.

12장 1절은 이후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요약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강조한다.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닮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반면에 악을 미워해야 한다. 이 악은 다른 외부적인 악보다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죄이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교만함이다. 우리는 죄와 교만함이 우리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일부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악이며 미워해야 하고 다스려야 하며, 악을 행하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을 행해야 한다.

앞뒤 문맥을 통해 우리는 12장 1절에 등장하는 산 제물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본문을 읽어보자.

1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절에는 제사의 현장에서 쓰일만한 단어가 3가지 등장한다. 첫번째 단어는 제물이다. 제물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1절에서는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이라는 형용사들이 제물을 꾸며준다.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은 구약 본문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지만 산 제물이라는 말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 제사는 동물을 죽이면서 시작된다. 제물이 죽지 않으면 제사가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영단번의 제사가 드려진 이후에는 더 이상 죽이는 제사는 없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되신 제사가 다른 제사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다른 죽이는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는 화목제물이신 예수님께서 불충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산 제사만 있을 뿐이다. 성도는 화목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 때문에 살게 되었고 더 이상 죽이는 제사가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어는 ‘드리다’ 이다. 제물은 하나님께 바쳐진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1절에서 드린다의 목적어는 너희 몸이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형식이다. 우리는 몸이라는 형식을 가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삶을 살아낸다. 몸은 우리의 인격도 포함한다. 몸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몸을 드리다는 의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 단어는 ‘예배’ 이다. 예배를 꾸미는 영적이라는 단어는 해석하기 애매한 단어이다. 뜻을 풀어써보면, 물질적이라는 말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영적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영적이라고 번역된 말은 합리적인, 사려 깊은 이라는 의미도 포함할 수 있는 우리말에서 찾을 수 없는 폭이 넓은 단어이다. 사도 바울의 저술 형식에 따르면 영적이라고 번역된 말은 정말로 ‘영적’ 인 의미로 사용되는 다른 단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원한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응답과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정의로우심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드려야할 가장 타당하고 사려 깊은 예배의 형태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사려 깊고 합리적인 예배의 형태이다. 이 예배는 구약 시대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와는 구분된다. 제사는 제물을 죽이며 정결함을 얻고 의로움을 얻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 드려지던 제사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드려지던 제사의 모형일 뿐이였고, 그림자일 뿐이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셔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정의로우심을 체험한 자들이다. 우리는 산 제물이 되어 몸을 드린다. 몸을 가지고 땅에 발을 붙이며 호흡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순간매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몸의 예배, 삶의 예배로 드린다.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자비에 순전한 반응이며 감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제물


로마서 15장 16절은 특이한 구절이다. 다른 바울 서신들은 바울 자신을 제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바울은 제사장이며, 이방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한다.

16절 :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말로 번역된 ‘이방인을 제물로’ 라는 말은 해석적 관점이 첨가된 번역이다. 원문에서는 이방인의 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 번역은 이방인 즉, 제물 이라고 번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앞서 살펴 보았던 것과 다르다. 바울이 제사장이며 이방인이 제물이 된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통해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된다. 이것은 이사야 66장 20절의 성취이다.

20절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이방인의 제물이라는 말은 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방인이 바친 제물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방인이 가진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해석되면 바울의 역할은 이방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중인 제사장이 아니다. 이방인이 제사장인 바울을 찾아와 자기가 가지고 온 예물을 바울에게 주면서 바울에게 제사를 드려 달라 부탁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이 제물이 되는, 우리말 번역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사도 바울이 더 문맥상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미 12장 1절에서 이방인인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했다. 또한 성령 안에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되는 일은 사람에게 일어난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변화된다.

15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 방문 계획을 말하면서 서바나 선교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 하는 대목이다. 이런 대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사장 직분을 이야기 한다. 제사장인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제사하는 일로 비유하며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 제사란 이방인들을 전도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5장 16절 말씀은 12장 1절과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예배일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 또한 예배이다. 여기서 신약의 예배와 구약의 예배가 구별된다. 구약의 예배는 의식적이며 장소적으로도 제한적이였다. 성전이라는 공간에서 특정 시간에 특정한 직분을 맡은 자가 할 수 밖에 없는 경직된 제사였다. 하지만 신약의 예배는 몸의 예배, 삶 전체가 예배가 된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으며 이것은 개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것 자체도 예배의 한 부분이 된다. 제물이었던 자가 제사장이 되고, 제사장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세 가지 제물, 한 가지 목적


우리는 이 때까지 로마서에 등장하는 세 가지 제물을 살펴보았다. 세 가지 제물은 로마서를 관통하며 로마서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 로마서의 목적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정의로움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우리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제는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예배이며,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예배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 되심으로 우리는 우리만 거룩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만으로 예배는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과 때가 예배의 순간이며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이 예배의 영역이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윤리적 삶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파의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무엇을 먼저 세우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둘이 함께 모두 이루어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자라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배하게 하신다. 이 예배는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사랑과 정의에 대한 반응이다. 감격과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식이나 우리가 고안해낸 의식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습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피조물을 창조주로 섬기며, 창조주를 피조물로 바꿔 섬기는 어리석고도 무지하며 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시기에 먼저 우리에게 자신이 좋아하시는 것 싫어하시는 것을 먼저 알려주셨다.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기준이 오늘 함께 나눴던 세 가지 종류의 제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