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7일 월요일

내가 네게 보이리라 (요한계시록 4장 1절 / 20.04.28)

요한계시록 4장 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제목 : 내가 네게 보이리라


환상의 시작


오늘은 함께 요한계시록 4장에서 6장까지를 함께 살펴볼 예정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일곱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며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오늘 공부할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 사실은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에 있었던 일곱 교회 성도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본 것은 환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실재를 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실재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보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고 마땅히 일곱 교회와 그 외의 교회들, 지금 우리까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환상을 보여주셔서 그것에 의미를 담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환상에 담긴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읽는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만 쓴다면 편지의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고대 로마시대와 같이 편지를 보내는 것이 힘들었던 시대에는 더욱 편지 하나를 보내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보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일곱 교회가 편지를 보고 바로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환상과 비슷하게 그리고 특벼하 교회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담아서 사도 요한에게 황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환상을 잘 보고 기억하여 기록하였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시길 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 보좌의 환상


4장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끝내고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일곱 교회가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고 있고, 더 큰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 보좌의 환상은 이 세상의 지배자는 지금 로마 제국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계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시고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환상 중에 하늘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마땅히 될 일, 즉 사도 요한 이 후의 모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늘에 보좌를 보게 되고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무아지경의 상태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보고 들은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역사하셔서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것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사도 요한의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표현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을 묘사하는데 다양한 보석을 빗대어 설명합니다. 벽옥과 홍보석과 같은 보석을 이야기 하지만 보석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기 보다는 보석으로 꾸민듯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한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지개가 보좌를 둘러 보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치입니다. 흔히 노아 언약에서 무지개를 보여주신 것과 연관시켜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보좌는 천상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무지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지상에서 무지개를 볼 때에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늘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치 입니다. 보석처럼 빛나시고 빛나셔서 무지개가 둘려있을 만큼 빛나는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늘 보좌 곁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구약의 교회였던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가리키고 신약의 교회를 가리키는 열 두 사도를 상징하는 자들로 구약과 신약시대에 존재했던 모든 믿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죄사함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왕노릇과 영광을 나타내는 금관을 쓰고 보좌 곁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자들입니다. 보좌 옆에는 켠 등불 일곱 즉,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보좌 앞에 계신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 네 생물을 구약에도 등장한 적 있는 것 같은 생물들입니다. 에스겔 1장 5절, 이사야 6장 2절에서 이와 비슷한 생물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그룹, 스랍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로 보입니다. 이들은 각각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 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네 생물을 모든 피조물의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1장에서 인간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고백하는데 반해, 네 생물들은 시간 순서대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찬양합니다. 이들에게는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5장에서는 네 생물이 등장하는데도 모든 만물의 찬양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에 네 생물은 모든 피조물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찬양하는 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의 찬양 후에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이 이어집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십사 장로는 모든 역사 가운데 존재하였던 교회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의 찬양은 교회가 드리는 찬양입니다. 장로들은 엎드리고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히며,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받은 면류관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 관을 받을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의미로 면류관을 드리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드리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인하여 찬양하며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로 하나님께 찬양드림이 마땅합니다.

어린 양의 환상


5장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사도 요한이 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가득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만드는 양피지는 원래 앞뒤 양면을 쓰는 종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앞뒤를 사용하여 두루마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곱 번 완전히 봉인해서 아무도 함부로 이 두루마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 이런 비밀스러운 두루마리가 있는 것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이 담긴 두루마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상이 적중하듯, 이 두루마리를 펴서 볼 존재는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수 있는 자가 없어 울지만 유대 지파의 사자이자 다윗의 뿌리이신 자가 그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때시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라는 말은 동물 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자라고 이야기 할 때와 같이 유대 지파를 대표하는 사자, 유대 지파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다윗의 뿌리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유다 지파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다윗에게서 나온 사람,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윗의 근본,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은 다윗을 다윗 되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고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을 보게 되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게 됩니다. 일찍이 죽임 당했다는 것은 빨리 죽었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죽임 당하셔서 그 죽임 당한 효력, 죄사함의 효력이 일찍이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일찍이 죽임 당했다는 말을 통해 이 어린 양이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천국에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 양으로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13장에 등장하는 머리 일곱과 뿔 열이 달린 짐승과 대조하기 위해서 또한 죄를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일곱 뿔은 예수님이 가진 권세를 뜻하고 일곱 눈은 성자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신 성령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셨습니다.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은 어린 양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새노래를 부릅니다. 새노래는 질적으로 다른 영적 노래 입니다. 어린 양의 사역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나라와 제사장 삼으신 것을 노래 합니다. 이 때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의 백성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 합니다. 지금은 미미하고 우리의 왕노릇이 얼마나 세상에 미치는지 체감조차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로들과 네 생물 외의 많은 천사들이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찬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 주어주셨고 우리를 자기 백성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격과 감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찬양하는 존재 입니다. 그저 찬양 받기 합당하다는 가치 판단으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들의 찬양이 끝나고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립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네 생물은 아멘이라 화답합니다. 네 생물은 자신들의 찬양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찬양에 동의를 표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장로들의 엎드림은 급작스러운 모양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의 찬양하기 위해 엎드릴 수 있는 찬양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곱 인의 환상


6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어린 양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재앙의 묶음이 세 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곱 재앙의 묶음 속에서의 순서도 역사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재앙 하나하나를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입시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실제 일어날 것이나 일어났던 어떤 한 사건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통하여 재앙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우리는 재앙의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통해 어떤 뜻을 우리에게 전하시려는지 집중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재앙의 순서 뿐만 아니라 재앙의 근본, 재앙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장과 5장 내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재앙의 근본이시며 재앙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돌보셨듯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돌보십니다. 그리고 재앙 또한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성도는 자기 앞에 있는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사랑을 재앙 중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재앙 조차도 주관하시며 그 재앙을 통해 교회를 향한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십니다. 재앙의 환상을 볼 때에 꼭 명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첫째 인을 떼실 때, 흰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흰 말은 복음전파를 가리킵니다. 이 말을 탄 사람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활을 가지고 복음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싸우시고 면류관을 받아 승리하셨음을 표시하십니다. 복음은 이길 뿐만 아니라 이기려고 합니다. 이기려고 한다는 의미는 아직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겼고 최종 승리까지 이기려 한다는 흰 말의 목적을 이야기 합니다. 흰 말을 타고 그리스도께서는 활을 들고 영적 싸움을 싸우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둘째 인을 때니, 붉은 말을 탄 자가 나와 땅에 화평을 없애고 서로 죽이게 하고 큰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붉은 말은 핍박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34절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핍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러 왔노라 말씀하신 것처럼, 붉은 말을 탄 자는 평화를 없애고 사람들에게 칼을 주어서 서로를 죽이게 합니다. 복음 때문에 사람에게 핍박 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을 때니, 검은 말이 나와 그 탄 자의 손에는 저울이 있습니다. 저울은 적은 양의 곡식을 뜻하는 의미로 기근을 가리킵니다. 기근이 일어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를 받고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의 품삯입니다. 밀 한 되는 하루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 있는 그런 가난한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되의 밀은 한 가족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보리 석 되를 먹을 수 밖에 없는데 보리는 밀보다 질이 떨어져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중해권에 생활하는 사람들은 감람유와 포도주가 없으면 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치품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지중해 권에 사는 사람들은 감람유와 포도주가 생활의 필수품이었습니다. 먹을 주식은 기근으로 부족하여 지지만 감람유와 포도주는 남아서 그나마 살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보여주십니다. 

넷째 인을 때니 청황색 말이 나왔고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입니다. 죽음의 재앙을 뜻합니다. 넷째 인의 재앙은 땅 사분의 일을 전쟁과 흉년 등으로 죽일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온 세상을 말합니다. 로마나 이스라엘 등과 같은 어느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재앙이 전 역사 가운데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 땅에 생명체를 대상으로 사분의 일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분의 삼은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사분의 삼을 살리신 사실을 기억하며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섯째 인을 때니, 순교자들의 호소가 하나님께 닿아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히시며 잠시 쉬라 말씀하시며 그 수가 차기 까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이뤄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죽음을 갚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순교자들의 호소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원한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참되신 성품을 지키기 위해서 호소합니다. 더 이상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로운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고 그들의 성결함과 거룩함을 인정하시고 아직 순교자의 수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역사는 좀 더 진행되어야 하고 복음도 더 전파되어야 하며 복음으로 인하여 죽는 순교자들도 더 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섯째 인을 때니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은 털로 짠 옷을 입힌 것처럼 검어지고 달은 피 같이 변하고 하늘의 별들은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듯 땅에 떨어집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 장군들과 부자들,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 즉 ,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은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바위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노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조차 믿지 못하는 자들은 누가 능히 서리요 라는 말로 그들의 결말을 암시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에 우리는 재앙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해야 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바위와 굴에 의지하여 숨김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예수님의 통치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기록하고 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환상을 기록합니다. 사도 요한은 비록 환상을 보고 환상을 기록하였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몽롱하거나 오락가락하는 어떤 취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는 환상을 똑똑히 보고 잘 기억해두었다가 계시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그 환상들을 보며 그 속의 의미들을 찾아내고 필요한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재주를 주셨던 브살렐과 같이 사도 요한은 주께서 주신 환상을 총명하게 알아듣고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지혜롭게 설명하고 재주있게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브살렐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성막을 지었듯이, 사도 요한은 맨 처음 환상으로 하나님께서 앉으신 하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로 하늘의 보좌를 우리 앞에 재현해줍니다.

브살렐이 만든 성막은 이동하는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보여주십니다. 로마 황제는 로마에 앉아서 전 세계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말이 그의 영토에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하였고, 모든 사람이 대화하는 말은 로마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은 어디서나 하늘입니다. 어디서나 하늘을 볼 수 있고 이 땅 어디이든지 하늘 아래 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곳에는 어떤 피조물 보다도 뛰어난 네 생물들과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나타내는 24 장로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을 높히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세는 로마 황제의 것보다 더욱 크고 놀랍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는 일곱 인의 책을 취하십니다. 일곱 인을 풀 때 마다 세상은 둘째 인부터 격렬한 핍박과 기근과 죽음 등 하나님의 재앙이 세상에 임합니다. 재앙을 베푸시는 이가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시고 함께 고난에 동참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픔을 더욱 잘 이해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재앙은 그 재앙이 제한된 범위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포함된 재앙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진노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 중에도 평안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지 않고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돌봐주시기를 자녀와 같이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평안을 누렸을 것입니다. 재앙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통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는 운동원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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