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8절-20절
18절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절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절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제목 :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죄를 아는 것. 죄를 가르치는 것.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1장 17절은 바울이 믿고 고백하는 복음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다윗의 자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 입니다.하지만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복음이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복음이 필요한 존재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이 필요없다면 복음을 들을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아는 것이 복음의 귀중함을 아는데 꼭 필요한 순서입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 믿고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4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율법 중에 어떤 것을 순종함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범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죄를 죄로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모르는데 하나님의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의롭고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면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진노하시고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한 자에게 죄인이라 낙인찍는 하나님은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관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으로 하나님을 불공정하고 불의한 재판관으로 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온 인류에게 자신의 뜻과 말씀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서 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절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지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미술작가의 그림이나 조각을 보고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위치에서 피조물을 빚으시고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의 뜻과 생각을 표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 자신의 뜻과 생각을 담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뜻과 생각을 담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섬기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가 계시며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까지만 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즐거워하길 원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죄를 짓지 않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피조물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 심판대에 피조물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몰랐다는 핑계를 댈 수 없도록 하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장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우리에게 제안하셨지만 우리는 그 기회를 비렸기 때문입니다.
일그러진 예배, 피조물이 창조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통해 자신의 뜻과 생각을 우리에게 일부나마 알려주셨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피조물을 통하여 우리가 창조주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으로 마음이 어두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곳 저곳에 이정표와 지도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따라 피조물에게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담아놓으신 조그마한 조각을 붙잡고 피조물을 창조주로 섬기며 즐거워합니다. 사실 그 깊은 마음에는 허망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 하나님의 공의롭고 정의로운 심판 앞에 불공평과 불의를 느끼는 것,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진노하셨습니다. 17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서 나타났다고 했는데,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가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진노는 그저 분노와 복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끝마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시는 사랑의 반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버려두신 창조주, 순리와 역리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는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정욕대로 더러움 가운데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정욕은 성적 욕망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욕심 전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착각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인간은 죄를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 밖에 행할 수 없습니다. 죄로만 기울어져 갑니다. 이 현상은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두 죄악은 간음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으며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간음을 행할 것인지, 영적으로 간음을 행할 것인지의 문제일 뿐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의분을 참을 수 없어 주님을 찬송하는 말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송받으실 이신데도 사람들은 더러움에 빠져 육체적 간음과 영적 간음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더러움 가운데 내버려두셔서 인간은 간음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24절에서 말하는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라는 표현은 문란한 이성애적 성관계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26절에서 27절에는 하나님께서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셔서 발생하는 죄인, 동성애적 성관계를 말합니다. 바울은 동성애적 성관계를 설명하면서 순리와 역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순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이야기 합니다. 반대로 역리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입니다. 바울은 앞에서부터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인간의 죄 속에서 뒤집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피조물을 창조주로 착각하는데 머물지 않고 창조주가 창조하신 피조물간의 관계도 비틀어버린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남자와 여자의 질서가 아니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며,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요즘은 동성애를 존중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장 26절에서 27절이 말하는 동성애 관계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성애가 아니라 다른 특수한 형태의 동성애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역리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이성애자인 사람이 동성애 행위를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당시 바울이 살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대부분 동성애를 행하는 남성들을 양성애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은 보통 여성과의 결혼 이전에 나이 어린 아름다운 소년들과 관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서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끄러운 일을 행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이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형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빠진 것 자체가 형벌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부끄러운 욕심 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그 자체가 그들의 그릇됨에 대한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끄러움 욕심 가운데 버려두신 결과 중 하나일 뿐아러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중대한 죄이기 때문에 먼저 다루었습니다. 28절부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상실한 자를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입니다. 이 모든 것도 역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지 않는 삶.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신 새창조의 삶을 거부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인간의 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진노하셨고 그 진노의 표시로 우리를 내버려 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내버려둠을 당한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사형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도덕과 양심이라는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행동이 올바른 행동인가, 아닌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 이 기준에 대해서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죄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 있고 그 감각으로 인하여 자신의 행동을 평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도 자신은 사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추가할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형에 처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또한 옆에 친구가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을 볼 때에 옳다고 인정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예는 주변에 수없이 많습니다. 신문 사회면이나 뉴스를 보다 보면 기억할 수도 없을 만한 수많은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더러움 가운데 내버려 두시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시며,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으로는 가슴 속으로는 내가 하는 행동이 벌 받을 행동이고 생각이고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모르는 척,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내 것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인에게 의미 있는 복음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벌 받을 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 벌은 사형입니다. 목숨을 내놓아야만 사죄 받을 수 있는 더럽고 부끄러우며 상실한 마음 가운데서 끓어오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태워 없어질 죄인에 불구하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불쌍하다고 변호해 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같은 더럽고 부끄러우며 아무 것도 없는 자에게 오셔서 깨끗하다고 말씀해주시며, 불쌍하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숨으로만 사죄 받을 수 있는 죄에 우리 대신에 목숨을 내놓으시므로 우리가 죄에 대한 형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인 됨을 먼저 끄집어 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직시하고 우리의 부끄러운 욕심을 드러내며, 우리의 하나님 없는 상실한 마음을 고발합니다. 누구도 변호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허망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미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는 마음이 어두워져 버린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어리석고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져 없어질 다른 것에서 찾아다니는 우매한 자에게 진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신 지혜가 되어 주셨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인인 우리에게 보내셨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기에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인 됨을 분명히 깨닫고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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