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9일 월요일

큰 폭풍이 일어나 (요나 1장 4절-10절 / 21.03.30)

요나 1장 4절-10절

4절 :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절 :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절 :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절 :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절 :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절 :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절 : 자지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제목 : 큰 폭풍이 일어나


서론 : 문맥과 배경


구약 선지서는 시작할 때, 항상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 행위가 실제로 입으로 목소리로 선포하는 것인지, 글과 종이로 전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요나 선지자는 다른 선지서와는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은 처음 요나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요나 선지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불러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가 저지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저번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니느웨는 배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을 기대하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가 주워진 사명에 헌신할 때까지 요나 선지자를 끝까지 쫓아가십니다. 말씀을 살펴보면서 요나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본론 1: 폭풍이 일어나다 (4-5)

 
요나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스는 현재 스페인의 남부 해안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스페인의 고대 도시 타르테수스 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니느웨까지는 대략 1,200km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당시에는 그 먼 거리를 도보로 걸어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걸어가는 도중에는 사막도 있고 험한 길도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단독으로 1,200km의 거리를 간다는 것은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라는 단 한 명의 선지자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요나는 혼자서 그 먼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말을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니느웨 성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이동해야 했으며, 니느웨 성에서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신 사명은 목숨을 내놓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니느웨를 향한 여행은 분명 죽음을 향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길이 위험해서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길은 마치 지금 홍콩 사람이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홍콩 자유에 대해서 연설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중극 사람들은 분명 홍콩 사람의 외침을 무시하며 공안들은 그를 잡아내어 조용하도록 만들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요나는 분명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수이자 악독한 니느웨에게 가는 것보다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던 것은 요나 자신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죽음을 택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죽길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얻길 원하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에 순종하길 원하셨습니다. 큰 바람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의지는 강압이나 폭력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배에 올랐던 요나조차도 살려주셨습니다. 요나에게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하셔서 요나의 생각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강압이나 폭력이 아닌 교육과 학습이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에 마음으로부터 동의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벌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가르침을 주시고 요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생각을 바꾸시고자 큰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죽음을 각오하였습니다. 요나는 배 밑에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사공들은 큰 바람에 목숨을 잃을까봐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질 정도로 바람이 강력했지만, 요나는 깊이 잠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요나가 잠이 들었는지 잠든 척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큰 바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 잠든 것으로 보입니다. 요나는 완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뜻을 듣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본론 2 : 요나와 선원들 (6-8)


선장은 요나가 배 밑층에서 잠이 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는 이미 삶을 포기하고 잠들어 있었지만 선장은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우며 일어나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 조성한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자신의 신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잠들어 있던 요나를 깨우던 선장의 마음에도 한 명이라도 더, 다른 신에게라도 더 기도하게 되면 이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전능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희망이 아니라 폭풍 속에 아수라 장으로 변해버린 배 안에서 자신의 삶을 놓아 버린 듯 잠을 자고 있던 사람에게 하던 억지였습니다. 선장은 요나에게 부탁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극적으로 바뀔 것아리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에 닥친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하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제비 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우시지 않았을 경우 제사장의 가승 흉패에 부착된 우림돠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종의 제비뽑기로 우림과 둠밈에 각각 의미를 부여하고 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둘 중 하나를 뽑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땅을 나눌 때에도 제비를 뽑아 각 지파의 땅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을 처음 세울 때에도 제비를 뽑아 하나님께 뜻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이었던 선원들이 이런 뜻을 알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믿음 없는 제비 뽑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이 요나를 위한 무대였음을 알려주십니다.

폭풍 속에 위태로운 상황이 요나를 위해 마련된 무대였지만, 이방 선원들이 아주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원들이 하는 행동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요나는 분명 폭풍이 올 때에 잠이 들었지만 이방 선원들이 했던 행동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요나가 직접보고 경험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원들이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쳤던 그리고 마땅히 기도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각기 자신이 믿는 신에게 구하고 있던 이방 선원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만국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했던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방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고 자기 살 길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이방 선원들에게서 마땅히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와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임을 회피함으로 이방 선원들은 각자의 우상에게 기도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제비 뽑기 가운데 일하셔서 요나가 제비에 뽑히도록 하셨습니다. 이방인 선원들은 요나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요나가 믿는 신이 누구이며 네 직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고 나라가 어디이고 민족이 누구이냐 묻습니다. 이방인 선원들의 질문은 정확히 선택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사명과 역할을 다시 묻고 있습니다. 또한 요나 개인적인 소명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백성들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불순종과 불성실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3 : 요나의 고백 (9-10)


요나는 이방인 선원들의 추궁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게 됩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자신을 설명합니다. 요나는 자신을 설명하는 듯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고백을 통해서 요나 스스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피해서 어디에도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단어 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넘어서 왔다라는 뜻으로 유브라테스 강을 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아브라함의 처지를 두고 이야기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자신의 아버지와 친족과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땅으로 떠났습니다. 히브리라는 말 속에 여호와를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요나의 입에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이라는 말은 바다를 포함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합니다. 바다, 육지, 하늘은 온 우주를 대표하는 피조물입니다. 요나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하였습니다. 온 땅과 바다와 하늘의 하나님을 피하려 달아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나 말이 맞지 않는 말입니다. 선원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심히 두려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한 말에 너무나 반대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나가 하는 말을 들었을 대에 요나는 전혀 자신의 말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행동은 명백히 요나가 섬긴다고 말하는 신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선원들은 그런 일반적인 두려움으로 두려워 했습니다.  

선원들이 가졌던 두려움은 온 세상에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든 요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여러 많은 신 중에 한 분이 여기 있는 요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났구나 하는 정도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원들이 이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라 온 세상에 유일하신 창조주이며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서 선원들을 더 궁지에 몰아 넣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요나를 설득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시므로 요나의 소명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폭풍 속에 위태한 이방인 선원들을 살리는 것도 아니고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듣고자 한 것도 아니고 요나의 불성실한 태도를 고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과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 다른 민족들까지도 함께 사랑하며 살길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요나를 위해 꾸며진 무대


요나가 겪고 있는 경험들은 모두 처음과 끝이 정해진 하나의 연극과 같아 보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는 것까지 다 예상하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배에 같이 타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 명, 한 명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짜여진 각본대로 숨쉬는 것까지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 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선원들 각각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어느 상황을 주시고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끈기있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의 뜻에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요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정작 자신은 온전한 신뢰를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감람산에서 땀이 피로 변하기 까지 기도하셨던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그 뜻 그대로, 제자들을 가르친 그 가르침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받아드셨습니다. 요나의 태도는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 입니다. 어느 누구도 요나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선원들이 요나의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우리를 위해 꾸며진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알게 누리는 이번 고난 주간 한 주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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