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4일 일요일

스바냐의 구조 (스바나 2장 1절-3절)


스바냐 2장 1절-3절

1.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제목 : 스바냐 의 구조


  지난 시간에는 스바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배웠다. 선지서를 읽을 때 선지자 자신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다. 선지서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위에서 선포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들을 알지 못한다면 문자적으로 선지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주신 의도와 진정한 뜻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바냐의 배경은 첫째, 요시야 왕 시대 사람이었다. 요시야 왕은 8세에 정변을 통해 세워진 왕이라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 왕 대 부터 이어지던 우상숭배의 전통을 끊어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어린 왕을 등에 업은 세력은 포학과 전횡을 일삼았다. 둘째, 스바냐는 선지자였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박했던 시대였다. 요시야 왕이 등극하고도 18년 째 되던 해에 율법책을 찾았다. 므낫세 왕 55년, 아몬 왕 2년, 요시야 왕 18년을 합치면 무려 75년 동안 율법이 없는 채로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시대에 스바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도 온 세상을 쓸어버린다는 말씀을 선포하였다. 셋째, 스바냐는 왕족이었다. 사실 스바냐는 왕족 취급도 받지 못할 방계 후손이다. 그러나 그의 족보를 5대 째나 기록한 이유는 그의 5대 째 할아버지 히스기야 왕이 온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한 것처럼 지금은 왕이지만 아무런 힘이 없지만 요시야 왕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과 그렇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족보를 밝혔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스바냐의 내용을 읽어나가면 스바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어떤 뜻으로 선포되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시간에는 스바냐의 전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스바냐 선지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과 요시야 왕에게 선포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스바냐서는 심판의 예언과 구원의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바냐서에는 아주 극명하게 심판의 예언과 구원의 예언으로 구분된다. 대부분 많은 학자들은 1장, 2장, 3장 순으로 3단계 구성이 되어있다고 말한다. 1장에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서술하고 2장에는 열방에 임하는 여호와의 날, 3장에는 여호와의 날 이후에 일어날 구원에 관한 예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스바냐 선지자가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어떤 논문을 썼다고 생각하는 한계가 있다.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날에 대한 스바냐 선지자의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75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인 율법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며 돌아오라고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에 무서움에 대해 말하면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날에 대한 묘사가 무섭고도 극적인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판 예언과 구원 예언의 경계선이 바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이다. 스바냐 2장 1-3절 말씀이 스바냐 전체를 양분하면서 1장은 심판의 예언들로 2장 4절 부터는 회복의 예언들로 나눌수 있다. 사실 2장의 내용을 보면 이 내용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적에 대한 심판은 우리편에 대한 구원이다. 2장에서 각 나라들을 벌하고 난 뒤의 모습을 보면 남은 백성들이 평안히 살 것이라는 예언이 뒤따라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위하여 이 이방나라들을 벌하시고 예루살렘의 고위 관료들을 벌하신다. 그리고 완전한 형벌의 종료를 선포하시며 돌이켜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진정한 회복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스바냐가 선포하는 심판과 구원의 예언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께 돌아와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공의와 겸손을 구할 때에 구원 예언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둘째, 스바냐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가면서 등장한다.

  스바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시적 화자가 두 명 등장하는데 한 명은 선지자이고, 다른 한 명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박국서도 시적 화자가 선지자와 하나님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서로 대화하며 하박국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형식으로 전체적인흐름이 전개된다. 나훔서 또한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이 때는 시적 청자를 지정하여 그에게 수사적 질문 즉, 대답이 정해진 질문과 그에 대한 이유들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한다. 하지만 스바냐는 어떤 대화 형식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일방적인 선포가 이어진다. 선지자의 선포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가 교차적으로 이어진다.

  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화자가 되실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행동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것이 심판이든지 구원이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정 대상에게 행하실 일들을 선포하신다. 선지자가 화자가 될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한다. 너희가 이런 것을 잘못했다. 여호와의 날은 이런 날이다. 라는 설명과 함께 청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거나 노래할 것을 종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선지자는 끊임없이 말한다.

  스바냐의 예언은 투박하다. 나훔과 같이 백성을 설득시키려는 어떤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하박국처럼 어떤 이야기와 같이 주고 받는 대화도 아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선포하고 그 일이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어찌보면 답답한 구조이다. 하지만 이는 선지자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여호와의 진노가 얼마남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긴박하고 강력하게 잘 전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설교가 바로 이런 구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선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듣는 설교이다. 우리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포되는 말씀, 설교를 은혜의 통로로 삼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 방법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격과 교회 역사를 통해 정해주신 것이다. 주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섬길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셋째, 심판 예언과 구원 예언 모두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심판 예언과 구원 예언을 잘 살펴보면 교차대구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차대구 구조란 히브리 문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중심 되는 이야기를 비슷한이야기로 감싸서 중심되는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비슷한 예로 수미상관법이 있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같게 하므로 중간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교차대구법으로 이루어진 스바냐서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표제 (1:1)

         2. 여호와의 날에 내릴 심판 (1:2-1:18)
             A.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시는 여호와 (1:2-3)
                 B.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교자들을 멸하시는 여호와 (1:4-6)
                     C. 희생의 날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1:7-9)
                 B. ’예루살렘 주민(지도층)을 벌하시는 여호와 (1:10-13)
             A’.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시는 여호와 (1:14-18)
        
         3. 여호와의 날에 내릴 구원 (2:1-3:20)
             A. 구원의 실마리 (2:1-3)
                  B. 블레셋, 모압과 암몬을 벌하시고 ‘남은 자’가 받을 구원  (2:4-11)
                      C. 구스와 니느웨,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희생시킴으로 정결하게함 (2:12-3:7)
                  B’. 이방인과 유다 백성 중 ‘남은 자’가 받을 구원 (3:8-13)
            A’. 구원의 체험 (3:14-20)

심판과 구원에 대한 단락 중심에는 희생이 들어가 있다. 희생 없이는 심판도 구원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 희생은 죄 지은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희생은 희생 제사를 의미한다. 이 제사는 죄값을 치르고 죄에서의 정결함을 얻게 한다. 그리하여 남은 자들이 구원받을 만한 자로 서게 만든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희생당할 자 중에 항상 예루살렘 주민들, 즉 예루살렘에서 유다를 다스리는 지도층들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바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어린 요시야 왕을 등에 업고 포학과 전횡을 일삼는 유다 왕국의 지도층을 향한 용감한 예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예언은 전혀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의한 예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은 아직 어려 스바냐 선지자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스바냐 스스로도 방계 혈통으로 자신의 기반이 얼마나 탄탄할지 장담할 수 없다. 현직 왕 끌어내려 갈아치울만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스바냐는 얼마나 작은 자였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스바냐는 순수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무죄한 자의 피가 흐르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겸손을 외쳤다. 그리고 포학과 전횡을 일삼는 지도층들의 희생을 예언하였다.

  스바냐가 예언한 희생은 실제로 바벨론 왕국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바벨론 왕국은 예루살렘의 모든 지도층들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저항하는 자들은 처형하였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이 보는 데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중전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키셨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는 사라졌고 예수님의 의 만이 우리에게 남아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정결한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희생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정결하게 될 수 없다.

  이때까지 스바냐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 남은 자, 열방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면서 희생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희생은 당장은 바벨론 왕국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이루셨다. 사실 스바냐에는 명시적으로 메시야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복과 구원이 희생이 없이는 정결하게 하는 사역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심판 예언과 구원 예언에 각각 두 번씩 등장한다. 이제 예언의 각 부분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서 희생으로 이루시는 심판과 구원의 대상과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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