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7일 수요일

[함안지구] 함께 말씀을 듣자! (역대하 34장 29절-33절)

역대하 34장 29-33절
29.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현재의 문제>
오늘은 함안지구 SFC의 첫 공식적인 모임입니다. 이 첫 모임의 이름을 모닥불 기도회라고 한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SFC가 처음 시작한 것이 바로 모닥불 기도회라는 이름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조국 땅과 신사참배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우리의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닥불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몇몇 학생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닥불 기도회는 지금은 전국과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학생신앙운동, SFC가 되었습니다.

모닥불 기도회가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선배들은 기도 제목을 통일하여 모닥불 기도회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업충실, 복음전도, 교회봉사 이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위해서, 진리를 떠난 교회를 위해서 기도회로 모였는데 학업충실, 복음전도, 교회봉사라는 기도 제목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선배들이 기도했던 제목들은 전부 자기들만을 위한 기도 제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이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상황들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모닥불 기도회가 모이게 시작된 시점은 625 전쟁이 끝난 뒤였습니다. 온 나라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산에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예삿일처럼 보이지만 모닥불 기도회가 시작되던 그 시절에는 산과 나무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습니다. 대부분 산들은 포탄과 폭탄에 의해서 불타버리거나 피난민들이 사용하여서 민둥산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산에 있는 나무들은 거의 사람 손으로 심은 나무입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이 대한민국 땅 위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산에 나무조차 없었던 그 시절이라면 사람 사는 곳은 더 심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도 공장도 회사도 학교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의 중고등학생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자신들이 학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공부는 이 황폐해진 땅을 다시 회복시킬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학생인 자신들이 배우고 익혀야만 이 황폐해진 땅에 집도 학교도 교회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들이 모닥불 기도회에서 학업충실을 기도한 이유는 지금 당장 공사장에 나가서, 논과 밭에 나가 황폐해진 조국 땅에 무엇이라도 하나 세우는 것이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공부라는 방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끔 기도하듯이 시험 기간이 다가올 때, 자기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고 내 자리에서 내 역할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 가운데 학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선배들은 기도했습니다.

복음전도라는 기도 제목 또한 선배들은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보고 정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교회는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에 대한 어떤 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몇몇은 순교를 당하고 몇몇은 감옥에 갇혀 광복이 이르기까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분들이 주기철 목사님, 한상동 목사님, 주남선 목사님 등이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나서 방금 언급한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 교회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제일 첫째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한국 교회가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와 싸울 때에 그 밑의 학생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어른들이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운동과 그 내용이 같습니다. 신사참배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제일 첫째 계명도 지키지 못한 한국 교회의 무능력함을 보고 믿지 않는 자신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우습게 보거나 가볍게 보지 않도록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과거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교회가 순수함과 정결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할 때에 모닥불 기도회로 모인 학생들은 지금 자신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교를 보고 자신들이 지금 전도해야 할 자기 친구들을 보고 복음전도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선배들은 학업충실을 통해 조국과 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면, 복음전도라는 기도제목을 통해 조국과 교회의 지금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기도제목인 교회봉사는 어른들이 펼쳤던 신사참배 회개 운동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기도제목입니다. 이 때 당시 모닥불 기도회로 모였던 학생들 대부분은 신사참배 회개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목사님들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봉사를 기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신사참배 회개 운동을 하는 어른들의 생각과 그 뜻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올바른 뜻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그 생각과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선배들은 황폐한 조국의 재건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교회를 향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최선의 방법을 모닥불 기도회를 통해 구했습니다.

이처럼 선배들이 시작한 모닥불 기도회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지금과 여기 문제를 제대로 보고 학생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기도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기도회였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기도한 기도회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잊혀졌던 함안지구 SFC 모닥불 기도회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겪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할까요?

선배들의 기도 제목을 그대로 우리 모임의 기도 제목으로 삼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제목은 같을지 몰라도 기도 내용은 달려져야 합니다.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조국과 하나님을 배반한 교회가 있었던 시대가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는 전 세계 중에 11위에 들어갈 만큼 성장하였지만, 점점 사람들이 떠나가는 교회가 있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과 여기 이 곳에서 학생으로 무슨 역할을 하며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며,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첫 모닥불 기도회로 모인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모닥불 기도회를 해야 할까요?

<말씀 속의 문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는 요시야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요시야 왕은 남유다 왕국의 왕으로 남유다 왕국의 가장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한 왕이라고 보면 됩니다. 요시야 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나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는 므낫세라는 사람으로 유다 왕국의 왕으로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이 왕 때문에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마음을 먹으실 정도였습니다. 요시야 왕의 아버지인 아몬 왕은 므낫세 왕의 악행을 그냥 따라 했습니다.

므낫세 왕의 악행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상초월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을 평가할 때에 잘한 왕은 다윗의 길로 갔다고 말하고, 못한 왕은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우상처럼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성막이나 성궤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이 아닌 자기만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죄가 되냐 무슨 나쁜 짓이냐 할 수 있겠지만 이 일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죄로 여기시는 범죄입니다.

여로보암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범죄였는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술 시간에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도 진흙으로 우리를 빗으시고 생기를 넣어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동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나 인식의 범위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지 그 범위가 넘어선다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한, 장애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교제하시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우리의 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셔서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성경책에 있는 모세오경,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어떤 것을 받으시는지 받으시지 않는지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며, 그 자체로 사랑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요약이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이런 사랑의 법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셔서 주신 그 법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만족과 기준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하여 신을 만들고 그 신 앞에 자기가 만족할 만큼, 자기가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섬기는 이방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인간이 만족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그 때에 우리 마음 속에 심어두셨습니다. 비록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그것이 많이 망가져 진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내어 섬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율법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다시 한 번 더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걷어차고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이방의 우상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여로보암의 죄는 다윗의 길과 비교되어 악한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자기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 못하면서 자기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사칭하는 자들을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 평가하였고 그들이 추구했던 만족과 평안과 행복은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이런 여로보암의 죄보다 더 수준 높은 죄를 지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죄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방법대로 섬겼기 때문에 죄였습니다. 그러나 므낫세의 죄는 아예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므낫세의 시대는 이미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남유다만이 외로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여 주신 가나안 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땅과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강한 나라에 빌붙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나라입니다. 어떤 세상 권세도 이스라엘을 짓밟을 수 없고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왕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 신들을 믿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하늘에 더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영원히 두겠다고 약속하신 예루살렘 성전에 므낫세 자신이 만들어 새긴 목상을 세웠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더 이상 여호와의 성전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은 없고 바알과 아세라,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는 우상들만 득실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율법책, 즉 성경책은 성전 어딘가에 묻혀서 요시야 왕이 26살이 되는 해, 요시야가 왕에 오른지 18년이 되는 해까지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므낫세 왕은 5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그의 아들 아몬도 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무려 75년 동안 유다 왕국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방법과 가치관과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나 말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요시야가 왕이 된지 18년에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실제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까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만 잔득했던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하나님을 잊고 산 백성들을 비통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재앙이 내려지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나쁜 왕들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하나님 섬기는 것을 대신하여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의 값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만약에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을 모르고 지나갔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만한 자에게 율법책을 발견하게 하셨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사랑의 법인 율법을 주신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속의 해결>
요시야 왕은 이 문제를 가지고 선지자 훌다에게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떠나 범죄한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회개했던 요시야 왕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앙은 요시야 왕이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요시야 왕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듣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내리실 모든 재앙을 미루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은 자기 생각을 실천하게 됩니다.

요시야 왕은 오늘 본문 29절과 같이 사람들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장로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30절 말씀에 보면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왕 앞에 나아왔습니다. 요시야 왕은 장로들만 불렀는데 왜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왕의 말씀을 들기 위하여 함께 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요시야 왕이나 백성의 지도자인 장로들만 지켜야 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의 당사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고 지켜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옛적 출애굽 시대에 처음으로 율법을 받던 시절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말슴하셨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들을만한 큰 목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에 너무 무서워서 모세에게 부탁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시고 그것을 다시 자기들에게 전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특히 성막을 짓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오차 없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수고스럽게 똑같은 말을 두 번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경책,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에 쓰인 모든 말은 하나님의 백성, 언약의 당사자, 율법을 지켜야 할 자 모두가 직접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지 어느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교회에 계시는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중고등부 선생님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사랑의 법,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 모인 모든 백성을 보며 발견된 율법책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율법의 모든 말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움에 떨도록 저주의 말씀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려고 복의 말씀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의 모든 말씀 중에서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전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하나님을 정말 신실하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고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와 같았던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려고 따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의 옷이라 레위인 제사장들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입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잘 봐주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몸가짐을 위해서 만든 옷입니다. 기드온은 이런 사실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자기 때에는 그저 옷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기드온이 죽은 후에는 맣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하나님과 같이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으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랑하지 않아 후손들에게 조를 짓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모르고 우리가 바라는 데로 우리가 원하는 데로 우리가 만족하는 데로 하나님을 섬길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 정도는 봐주실거야 라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이나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 않겠어 하는 교만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들려주는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느끼며 보며 맛보는 세례식과 성찬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들이 행해지는 시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요시야 왕은 또한 모든 백성의 귀에 들리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적혀 있듯이 그저 높은 곳에 올라가 듣든지 말든지 그저 외친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도록 귀에 들어서 그 말씀이 어떠한지 자신들이 어떤 죄를 지어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지,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며 복을 주실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들려주었습니다. 백성들은 귀에 들린 이 말씀 때문에 다시 율법을 지키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살 동안에는 율법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에디오피아와 예루살렘은 정말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에디오피아의 여왕을 섬기는 내시는 믿음이 특심하여 그 먼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를 드리려 왔다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내시는 가는 길에도 성경을 펴 놓고 읽고 있었는데 그때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이 이사야 53장이었습니다. 내시는 이 말씀을 알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고난 받는 종이 등장하는데 이 종이 선지자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던 중인 전도자 빌립을 만나 그 말씀의 의미를 묻고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종이 바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해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를 듣거나 책을 찾아보거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성경을 읽고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 개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 전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성경의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막막한 부분들을 함께 나누고 고민하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일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알고 이해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위한 시간이 바로 각 교회마다 있을 학생회 시간입니다. 함께 들었던 말씀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그 고민들을 모아 결정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할지 이야기 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학생회 시간을 의미없게 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운 것들을 어떻게 우리 교회 생활에, SFC 시간에, 펼쳐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의 영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으니 두려움 없이 하시길 바랍니다.

<현재의 해결>
오늘 함안지구 SFC가 다시 모여 모닥불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말씀으로 하나 되는 함안지구라는 목표를 가지고 함안지구 SFC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우리는 모닥불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을까요?

율법책을 다시 찾았던 요시야 왕을 생각해 봅시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찾아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모든 백성이 모이게 하고, 모든 율법의 말씀을 다 읽고, 각 백성의 귀에 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왕을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노라고 언약하였습니다. 50년 넘게 우상을 섬겼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시절과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 함안지구 SFC의 기도 제목은 함께 모여 말씀을 듣게 하소서 가 되어야 합니다. 함안지구가 오랫동안 없었고 모닥불 기도회가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각 교회 SFC는 있었고 각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지만,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함안 지역에서 함께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들이 복음을 전해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함께 예수님을 믿는 옆에 교회 친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함안지구 SFC가 시작되었고 모닥불 기도회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도회를 통해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요시야 왕에게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귀에 들려 하나님께 돌아왔던 것처럼 모닥불 기도회가 그런 모임이 되고 이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함안지구 SFC 모닥불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함안지구 SFC 소속 교회가 기도회에 함께하게 하시고 기도회 때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려 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시다. 우리 모임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안 될까 두려워 말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해 나가는 우리 함안지구 SFC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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