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절 :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절 :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절 :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가? 성경을 어떤 태도로 묵상하며 읽어나가야 하는가? 에 대해서 배웠다. 오늘부터는 그 묵상하고 읽어나가는 그 순간 우리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워보도록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와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먼저 성경의 의미가 어떻게 내 삶에 다가와야 하는가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을 볼 때에 우리는 성경을 사이에 두고 저자와 독자라는 독특한 신분을 가지게 된다.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보면 누가라는 사람과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나온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차례대로 써 보내고 있다. 누가는 누가복음의 저자이며,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의 독자이다. 성경을 기록한 자와 성경을 읽는 자의 구분이다.
누가가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하나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누가는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누가가 하나님의 펜이 되어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가가 이 부분에서는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하는지 가르치셨다. 그러나 누가가 자라왔고 향유해온 문화, 누가의 배경 지식, 누가의 언어적 능력 등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것들로 누가복음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을 제 1 저자라고 부르고 누가와 같이 성경 기록에 사용된 인간을 제 2 저자라고 부른다.
성령 하나님은 누가복음을 기록하시되, 제 2 저자인 누가의 경험과 지식 등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하여 주셨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지만, 동시에 인간 누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부르며, 개혁주의 신앙은 유기적 영감설을 믿는 동시에 축자적 영감설, 만전 영감설을 동시에 믿는다. 하나님께서 제 2 저자가 단어를 선택하는 것에도 영감을 주셨고, 모든 성경 어떤 필요없어 보이는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였다고 믿는다.
제 1 저자, 제 2 저자의 개념이 정립 되었으므로 성경의 의미,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언어 등 그 역사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성경에 반영시키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이 그 당시 청중,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읽혔는지를 알아내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석의, 주석, 주해라고 한다. SFC가 속한 고신 교단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은 석의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성경에서 석의된 의미는 그 때 당시 독자들이 읽었던 의미이다. 이것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석의된 의미를 현대적인 의미로 가공시키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로 바뀐다.
석의와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한 번 살펴보자. 시편 2편 7절~8절 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7절 :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절 :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왕의 즉위식 때 사용되었던 노래라고 알려져있다. 이 본문을 석의해보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위에 오를 왕에게 말씀하셔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면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시편 2편 7절~8절은 즉위하는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의미를 담은 축복의 노래이다.
이스라엘 왕이 옛적 다윗 왕 같이 언약을 성취하는 주체가 아닌 현대에서는 이 말씀은 전혀 석의된 의미로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 언약을 성취한 시대, 예수님께서 부활 승리하시고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2편 7절~8절을 단순히 이스라엘 왕에게 부르는 축복의 노래가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
석의와 해석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분되는가? 성경을 석의하고 현대적 의미로 해석을 한 후, 다음 단계는 각 개인이나 공동체의 형편에 맞게 적용하는 일이 남았다. 적용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주신 의미를 맞추는 일이다. 대표적으로 말씀 사역자의 설교가 적용의 예로 들 수 있다. 설교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지를 듣는 시간이 된다.
정리하자면, 성경 말씀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과정을 도식화 한다면, 성경 말씀을 그 당시의 의미로 재현하는 것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그 과정을 석의라고 한다. 석의된 의미를 현대적으로 가공할 필요가 있으며, 그 가공 과정을 해석이라고 한다. 해석된 의미를 각 사람이나 공동체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접목시키는 것이 적용이라고 한다. 성경을 읽을 때에 이 과정이 한 번에 혹은 차례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퉁쳐서 해석이라고 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을 해석학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해석학에 대해서 배워보고자 한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할 때 사용하는 교재, QT 교재, 주일에 듣는 설교 등등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해석학적 관점이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없다. 해석학을 배우면 그것들의 어떤 의미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석학을 배우는 목적은 한 가지 해석 방법론이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의견들 중에 최악을 피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세우기 위해서 배운다.
해석학을 말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해석학이라는 것은 철학적 해석학을 뜻한다. 철학적 해석학은 옛날부터 있었던 그리스 로마의 고대 신화와 이야기를 해석하는 고전 해석학과 법을 해석하는 법해석학,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 해석학을 각각의 분야별로 다루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한 번에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이를 탈영역화라고 한다. 영역을 벗어나 어떤 것도 해석할 수 있는 일반적인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탈영역화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것은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를 순환하며 부분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그 단어가 속한 문장, 그 문장이 속한 문단, 문단이 속한 글 전체, 글을 구성하는 언어 체계까지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전체를 살핀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의 해석학적 순환이 일어난다. 그 때 해석자(독자)는 직관을 통해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알게되는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맨 처음 탈영역화를 시도한 슐라에르마허 같은 사람은 의미라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해석이라는 것은 글쓰기의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작가가 외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을 통해 작가의 내적 경험으로 돌아가서 작가의 심리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여 독자가 그것을 다시 느끼고 다시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자는 상상력을 가져서 상상 속에서 작가의 의도에 맞는 공감적 재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해석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작가의 의도가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텍스트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석의 방식은 과학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고정적이고 영속적인 규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해석이 규칙과 통제를 뜻한다면, 해석학은 규칙의 제정과 판결이 주된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슐라에르마허가 주장했던 심리주의와 객관주의는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심리주의의 경우에는 독자가 텍스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작가 그 자신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이다. 텍스트가 말하는 주제가 독자의 목적이다. 객관주의라는 말 자체도 어떤 선입견이 포함된, 어떤 관점이 적용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독자는 각자가 속한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과 딸이다.
사회적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 어떤 합의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해석을 도출해낼 방법은 도저히 없는 걸일까? 수많은 방법들이 제안되었고 그 방법들 모두 완전한 동의를 이끌어 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된다.
말은 그저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을 지정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모든 이성적 작용은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말도 의지의 표현이다. 말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여 어떤 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고 유도할 수도 있다. 말이 한 사람의 의도와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말이 의도와 의미를 포함하기 위해서는 그 말의 진위와 권한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확인하였을 때 진위와 권한이 확인된 의도와 의미가 담긴 말을 화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신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화행을 수행하신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화행은 주장이 아니다. 화행 그대로가 화행의 전체적인 의미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찾을 수 없다. 숨겨진 내면의 의도가 있을지 없을지 애매모호 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행의 의도가 화행으로 표현된, 그러니까 발화수반력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그 행동을 하도록 의도된 표현인지도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위 여부를 따졌을 때에 진리이다. 창조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명령하실 권한이 있다. 그 말씀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의도와 의미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화행을 수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화행에는 말하는 이와 말해진 것과 말하는 대상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생겨난다. 우리는 말하는 대상에 속한 자로 말하는 이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로지 말해진 것에 집중하며 말해진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야 한다.
말의 대상인 우리는 말해진 것에서 말씀하신 이의 의도와 의미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명령과 약속을 찾아낼 수는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령과 약속은 세계 어느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도 찾아낼 수 있는 명백하고 명확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도 명확한 명령과 약속이 있다. 우리 중에 있었던 사건은 사실이고 그것을 읽는 네가 더 잘 알기 바란다는 명령과 약속.
명령과 약속 사실 성경은 약속과 명령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될 것인지를 먼저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 주신다. 그리고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가 명령 받은 자로 명령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우리를, 성경을 묵상하는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다. 존재의 변화, 신분의 변화, 행동의 변화, 의도의 변화, 완전한 영화의 단계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성경 묵상을 계속하면서 지난한 해석의 과정을 우리 몸에 새기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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