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65-80절
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8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79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
80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완전하게 하사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 말씀의 시간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까닭 모를 고난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고난이 다가올 때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에 처할 때에 고난의 고통 보다는 시작도 끝도 모르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다고 하시는데 왜 우리에게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주시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시작도 끝도 모르는 고난은 견디기 힘듭니다.
까닭 모를 고난을 지낼 때에 우리는 절망 하기 쉽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원망 하기 쉽습니다. 고난 가운데에 불평과 원망만 남을 뿐 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끝 모르는 절망 속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부르는 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대해서도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끝없는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기 좋은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하는 것만 같은 고난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읽었던 시편의 말씀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앞서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난 당한 자는 오히려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 잘 순종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 가운데 무엇을 발견하였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시편 기자가 발견한 고난의 유익은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67절 말씀과 같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고 그릇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난 이 후에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였다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피부에 와닿을 만한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단순한 시행착오 차원의 깨달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죄 이 후에 모든 선행의 가능성들이 일글어져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남을 돕고 사랑하고 좋은 일을 이루어 가는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떤 이기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착한 일을 하는 듯하고 남을 위하는 일을 하는 듯하나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듯 겉모습은 그렇게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욕심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교만함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 가운데에서 어떤 교훈이나 유익도 찾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고난은 아기가 걷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넘어짐이 아니라 아무 유익 없는 고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바르게 깨닫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66절에 기도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주의 계명들, 주의 말씀들을 믿었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고난을 통한 교훈들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고난은 유익이 됩니다. 고난 주시는 자에 대한 신뢰와 의지함이 없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만 될 뿐입니다.
시편 기자가 발견한 고난의 유익은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75절에서 하나님께서 주님의 법으로 행하시는 주님의 심판이 의로우시며,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주님께서 성실하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의로우시다 와 성실하시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충실하셔서 그 말씀대로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괴롭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못할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붙들어 나가시는 하나님께서 마음 먹은 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실 때에도 그의 말씀만으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제한 받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에 메이시는 분이십니다. 끝없이 자유하시고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 자기가 말씀하신 그 말씀에 제한 당하고 제제 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결코 자신의 감정이나 어떤 충동에 의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자신의 법으로 우리를 재판하시고 그에 합당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재판이 인과응보적으로 너는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이만큼 벌을 받아야해 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습니다. 욥과 같이 어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험할 때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시편 기자가 77절에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시험 중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의 유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잘 깨닫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시며, 그 말씀이 우리 앞에 이루어 지는 것을 보게 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되고 성취되고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전수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도 오늘 시편을 통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심 같이 고난 가운데 위로해주시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말입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되었을 것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로 모인 성도님들에게도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복을 누리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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