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6일 월요일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장 9절~14절 / 19.12.8)


※ 교회 중고등부에서 나눈 말씀입니다. 2017년 이맘 때 쯤 나누었던 초등부 말씀을 확장 개편 전면 수정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설교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반말로 적혀 있으니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추신) 초등부 설교 때는 칼케돈 신경을 다 함께 읽었더랍니다~^^

요한복음 1장 9-14절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목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주의 집중>

성탄절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성탄절이 한 달 남았을 때는 우리를 특별한 이름을 붙이며 지킨다. 그래서 저번 주일이 무슨 주일인지 아는 사람? 저번 주일은 대강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대강절, 강림절, 대림절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핵심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래서 4번의 주일을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날이다. 비슷한 것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서 부활절에 이르는 40일 동안 지키는 사순절이 있다. 이 때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기억하고 묵상하는 날이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로 지킨다. 저번주에는 대강절 첫 주로 지켰다. 저번주 나눈 말씀이 기억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한 번도 안나왔는데 어떻게 대강절을 지켰다는 말이지 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저번주에 우리가 이야기 했던 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임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황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루어진다는 느낌 조차 들지 않는 세상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신다.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바벨론 나라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임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사람에게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직접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그 말씀을 꼭 지키도록 당부하셨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보통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는냐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복이 되고 이득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자기들이 먹고 배부를 만큼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만 않으면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었던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 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이득과 손해를 따졌을 때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셨지만, 인간이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관계를 되돌리기 위하여 애쓰셨다. 아담이 최초로 죄를 짓기 전에도 끊임없이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지은 이 후에도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아담이 죽고 난 뒤에도 계속 아담의 자손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알고 계셨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그 때와 그 시가 되어서 시행하셨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다.

<문제제기>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말씀을 주시는 방법에 있어서 전에 했던 방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다. 말씀으로 하여금 육신을 입게 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신 것이다. 음성으로 된 말씀, 글로 된 말씀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은 항상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졌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우리가 빛이 있으라고 말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이런 환한 낮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캄캄한 방에 있다가 스위치 근처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불 좀 켜라 라고 이야기 하면 전등을 켜줄지도 모른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가 빛이 있으라고 말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면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 가운데 빛이라는 것이 창조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전하시려고 하시는 뜻이 사람의 몸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온전히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람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했던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셨다. 예수님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였고,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님의 의지였다.

하나님의 의지는 어느 누구도 같을 수가 없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사람이 만든 연필이 사람이 하는 말과 생각을 기록한다 하더라도 그 연필은 자기를 지은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자기가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범위 안에서만 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의 이해와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하나님의 의지와 같았다.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알고 그 뜻을 실행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 혹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애매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완전히 동일하신 분이신가? 완전히 다른 분이신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힌트 제공>

요한복음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어떻게 계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다같이 한 번 더 본문을 읽어보자

14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설  명>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못 하다거나 더 뛰어나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자.

1절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존재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우리가 14절에서 읽었던 바와 같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와는 다른 시점을 가리킨다. 창세기의 태초는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때를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있는 태초는 천지를 창조하시던 시점 보다 더 이전 시점까지 포함한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라는 시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점이다. 아직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의미가 없다. 시간 순서가 없으니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실 때라는 어떤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영원히 낳으시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다.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1절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일한 영광과 존귀를 가지신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오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보이지 않는 영혼과 같은 존재라서 텅빈 인간의 몸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갔다고 생각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굳이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실 이유가 없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든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어느 누구나 예수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 나셨고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또 그런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사람 속에 있었다는 것은 사람의 괴로움에 무감각할 수 있다. 장갑을 낀 손이 괴로움을 덜 느끼듯, 사람과 다른 존재가 육신에 들어가 있다면 사람으로 느끼는 괴로움이 덜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처럼 배가 고프시고 피곤하시고 걱정이 많으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으로서의 한계 또한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사람이시기도 하시다.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기도 하시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 것인가? 예수님을 알기 위한 첫번째 단계로 인격과 본성을 구분하는 것 부터 시작한다. 인격이라는 말은 이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셔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신 것이다. 본성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이런 것들이 본성이 된다. 예수님의 인격은 하나님이시고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셨다. 그 두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이기도 했고 인간의 본성이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배고프시기도 하셨지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으셨고 예수님은 피곤하고 지치셨지만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병들고 약하여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걱정하셨지만 친히 목자가 되셔서 병든 사람이나 약한 사람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을 동시에 갖고 계셨다. 그것이 한 몸에 있었으므로 하나였고 두 몸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둘이 아니였다. 우리 인간은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로는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과 예수님이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포기하셨는지는 알 수 있다.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가지시되 완전히 가지셨기에 원래 가지고 계셨던 것들을 포기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완전히 자유로우시며 전능하신 능력을 포기하고 한계만 가득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그리고 무지하고 부족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우리에게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인간을 위해서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은혜 또한 위대하시다.

이번 대강절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오로지 자기의 말씀을, 자기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 많은 우리와 함께 계셨던,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즐거워 하며, 묵상하는 대강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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