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중고등부에서 나눈 말씀입니다. 2019년 2학기 마산대SFC에서 나눈 말씀을 좀 수정하고 추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1장 1절 ~ 3절
1.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달 초닷새라
3.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제목 : 그발 강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2019년이 이제 지난 해가 되려고 합니다. 남은 기간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로 딱 30일 남았네요. 2019년 시작할 때 즈음에 세웠던 계획들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2019년을 시작하던 1월의 우리와 비교했을 때, 좀 더 나아진 사람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좁쌀만큼 나아지든, 나아지지 않았든 여전히 우리의 신앙과 맞지 않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은 우리 신앙이 자랐던지 자라지 않았던지 관심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해가시고 붙잡아 가지는 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멀리 나갈 것도 없이 자기 옆에 불신 친구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하나님의 눈치를 1이라도 보는지요. 우리도 가끔씩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가 많은데 믿지 않는 친구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주일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든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려고 모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멈추고 내가 이 시간에 얻을 수 있는 모든 유익들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 왔습니다. 내가 이 시간에 책을 읽어도 30페이지는 읽을 테고, 영화를 봐도 한 편 정도 볼 시간인데 그것들로 찾을 수 있는 유익보다 하나님께서 내 일상의 주인이십니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시간에 나아왔습니다.
내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는 귀한 마음으로 올해에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지, 기도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해야지 마음을 먹는데도 여러가지 상황들과 내 마음으로 인해서 약속들을 지킬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내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일찍 일어나고 내가 좀 더 다른 일들을 미리 해놓아서 예배 시간이나 스스로 정한 거룩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좀 더 희생하면 됩니다. 조금 더 미리 미리 해 놓으면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내 마음에서 신앙생활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내가 이렇게 까지 희생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 하는 귀찮음 가득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내가 희생해서 신앙생활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환경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배우는 것에 대해서 싫어합니다. 그것보다 좀 더 공부를 시켜서 좋은 학교에 가길 바라고 취업을 잘 하길 바라고 취업을 하더라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어 보이는 모임에 가지 않길 바랄 뿐만 아니라 세상 가치에 더 초점을 두길 원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을 붙잡기 보다는 세상 가치에 더 무게를 두길 원합니다. 취업,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성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가치롭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세상의 가치를 쫓도록 만드는 이유는 세상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상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그 사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모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지금도 우리를 잘 보살펴주시는지, 지금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시는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한번 만 나타나시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을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오늘 읽어 보았던 에스겔의 상황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알았습니다. 자기 나라에게 패배한 유다 왕국의 신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을 떠나 온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정복한 나라들의 엘리트 계층을 자기 나라로 데려와 바벨론 제국의 일꾼으로 만들어 키웠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대표적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에스겔도 그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하여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에스겔은 대제사장 사독 집안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 25살 이었습니다. 제사장 집안의 레위인들은 30세가 되면 성전에서 자기가 맡아야 할 직무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서 그발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제사장 직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발 강 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이 도망쳐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을 확률은 희박했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마땅히 살아야 할 제사장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의 문제도 아닙니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의 공통된 문제였습니다. 에스겔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들이 에스겔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하는 삶을 방해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노래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다 함께 시편 137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철어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나라를 잃은 비통한 마음, 그 보다 앞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느껴집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바벨론 사람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혀가 입천장에 붙도록, 수금을 칠 수 있던 오른손이 수금을 칠 수 없는 손이 되도록 하길 원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시편 137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노래할 수도 없는 기가 막힌 상황 그 상황 속에서 에스겔은 자신이 제사장의 직분을 할 수 없음을 한탄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에스겔의 한탄은 그가 30살이 되고 넷째 달이 되었을 때에 멈춥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나라는 망해가고 왕도 함께 잡혀 왔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자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함께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힌 후에도 바벨론은 유다 왕국에 시드기야 왕을 세워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시드기야 왕이 즉위한 이후에 13년 간 유지되었습니다. 그 유지되는 동안 성전과 성전을 운영하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있는 자들,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있는 자들만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30살이 되어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한 에스겔도 자신의 거룩한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셔도 말씀으로 충분히 전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대로 믿고 살아가는 공동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에스겔에게 임한 말씀은 포로로 잡혀온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 왕국 주변의 이웃나라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고발하고 그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예언합니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자신들과는 상관 없을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은 전쟁에서 졌고 이미 포로로 잡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다 말씀하십니다. 또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과 새 이스라엘을 기대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힘을 자랑하시지 않으시고 자기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현장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입니다.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에스겔과 같이 우리는 취업과 돈, 세상 가치가 최고가 되어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말도 안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임은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함께 공부하고, 성경을 풀어 우리 삶에 적용하는 설교 말씀을 들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단하고, 나눈 말씀을 가지고 함께 그렇게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지지하고 위로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로 생활 하던 유대인들에게 전혀 상관 없었던 암몬, 모압, 두로, 애굽, 블레셋의 심판을 선포했던 에스겔의 예언처럼 지금 현재 상황에서 나에게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말씀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보여주시며, 자기 말씀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소망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에스겔이 받은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을 자기 말씀에 따라 심판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예루살렘과 이스라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따라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이루어 집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느냐? 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접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예배 중의 설교와 분반 공부 시간, 그리고 개인적인 성경 말씀 묵상의 시간 등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는 우리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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