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장 1절~2절
1절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2절 :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제목 :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붙혀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살아갈 때에 붙혀진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이야기 하는 예수쟁이라는 말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멸칭이었습니다.
예수쟁이라는 말은 그렇게 썩 좋은 말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예수 믿는 것으로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쟁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이름을 붙이는 게 더 실례가 된다고 하여서 교회쟁이라는 말도 생길 정도 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처럼 힘든 일입니다. 우리 삶은 도저히 예수님처럼 깨끗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조그마한 의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 의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만한 크기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만한 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는 인간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의도 없는 우리들 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찾아와 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예쁜 점 하나도 없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불러주십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시고 우리에게 먼저 말걸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예배드려야 겠다는 마음을 잘 지키기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바른 예배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노력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이 정한 수준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맙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나는 완전하지 못하구나. 나를 사랑해주시고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나의 감사한 마음,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마음도 전해드리지 못하는 존재이구나 하는 자괴감뿐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들에 힘을 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믿는 믿음 만으로 충분한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만의 법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우리가 만든 형식과 법에 집중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골로새서는 이런 배경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와 믿음이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폐기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고 이방 종교의 신비주의적인 의식들을 접목하여 쓸데없이 몸을 괴롭게 하는 고행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성도들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의 첫 인사 부분입니다. 평범한 인삿말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골로새 교회의 사정을 알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도의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를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시고 바른 길로 이끄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마음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을 찬찬히 살피며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합니다.
본론 1 : 사도 된 자가 보낸다.
<설명> 편지의 처음 시작은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를 짤막하게 소개 하는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으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에 따라 사도가 되었습니다. 통상 사도라는 직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불러 세우신 12명의 제자들에게 붙혀졌습니다. 그 중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12명의 자리에서 스스로 나왔고, 그 자리를 맛디아라는 제자가 다시 채웠습니다. 바울이 사도라고 불릴 만한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처음부터 예수님의 사역을 쭉 지켜보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을 믿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강하게 의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을 부르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로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 중에서도 이방인을 위해서 자신을 보내신 예수님의 소명을 끊임없이 확인하였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적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준비하셨던 복음이 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예수님께 직접 듣고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파할 기관인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이 아닌 것들이 침투하고 있는 골로새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골로새서라는 편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폐기된 율법이나 신비적 체험을 위한 고행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만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주기 위하여 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명> 사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직접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지방을 갔다는 진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3차 전도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3년 간 사역하던 때에, 에배소로 에바브라라는 골로새 사람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골로새에 교회를 세웠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교회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부분을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제자였던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를 세웠지만, 얼마 못가 골로새 교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바브라는 충분히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교회를 다시 복음 앞에 세울 수 있었지만 이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라는 스스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도록 위임받은 사도에게 나아가 교회를 다시 복음 앞에 세우길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골로새로 찾아갈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실한 제자였던 에바브라의 보고대로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빗나간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해서 다그치지 않고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도록 위임받은 사도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각 교회의 상황에 알맞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적용> 지금 현재에는 이런 사도라는 직분이 없습니다. 사도는 교회가 없던 시대에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세워진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온 세상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교회를 낳는 시대이기에 사도의 직분은 사라졌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사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직분자를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교회가 바로 서 가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골로새 교회가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듯이 교회를 움직이시는 그리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직분자를 신뢰함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론 2 : 성도와 형제에게 보냄
<설명> 사도 바울은 자기 소개를 끝낸 뒤, 이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한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항상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교회라고 그들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는 교회라고 불러주지 않고 성도들,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교회라고도 불리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거나 교회라고 불리지 못할 정도로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이자 자신의 제자인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인들을 전부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빌레몬과 그 가정, 에바브라와 같이 골로새 교회의 주요한 지도자들은 만나본 적이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이전에 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였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자 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성도요 형제라고 부릅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만남도 없었고, 사도라는 직분을 내세워 교회에게 이런저런 시정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성도로 골로새 교회를 걱정하는 한 형제로 편지를 보내는 바울의 심정을 알려줍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성도이자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성도이자 곧 형제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골로새라는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골로새라는 로마의 다스림을 받는 도시에 위치해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확실하고 견고한 구원의 소망되신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증명> 앞서 우리는 골로새 교회에 복음에서 약간 빗나간 가르침이 들어와서 말썽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가르침은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불안감을 이용하여 어떤 특정한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구원 받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골로새 교회에 만연하였습니다. 처음 전해진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 복음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따라가는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골로새에 들어온 빗나간 가르침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현혹하였지만 그들이 모두 복음에 빗나간 가르침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내용을 조금 교정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 태도와 서로를 사랑하는 행실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성도 곧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적용> 우리는 우리 가운데 부족해 보이는 형제들을 감싸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해주시고 자녀 삼아 주셨으며, 거룩한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신앙의 방향에서 약간 빗겨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성도요 형제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편지라는 실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빗나간 가르침을 교정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실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시기 까지 하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본론 3 :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설명>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 자신에 대한 소개와 편지를 받는 수신자인 골로새 교회를 부른 후,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하는 내용은 사도 바울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항상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인사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듯이 샬롬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하는 인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상투적인 인사 평안을 비는 것과 함께 동시에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은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한 단어로 요약한 단어 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한 댓가로 주인에게 받는 급료도 아닙니다. 말그대로 선물입니다. 일한 것이나 공로에 대해서 받는 당연한 보답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받아야할 보답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당연히 받을 수 없는 것을 호의로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빠져 죽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죽음 밖에 없었지만 은혜를 받음으로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평강은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은혜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사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 만들어 졌습니다. 바울의 인사 속에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지속되길 원하는 바울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골로새 교회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평강은 다른 어떤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강,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루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강을 이야기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골로새 교회 위에도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증명>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말한 것은 그저 인사말에 지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골로새 교회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골로새 교회의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아버지가 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혈통적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마음에 성령님을 받은 자들에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자녀가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 선한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이 세상 가장 귀하고 존귀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으로부터
골로새 교인들은 그들이 가진 불안과는 반대로 존귀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도록 특별히 부름 받은 사도 바울이 형제라고 부룰 만큼 그들의 교회됨, 성도됨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불안감은 그들 자신 속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발생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구원 문제를 우리 속에서 찾아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넘어지기 쉬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의지하기를 멈추고 흔들리지 않고 꺾이지 않는 견고한 근거, 이유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실하고 변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견고한 근거가 되십니다.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넘어지고 죄 가운데 빠져서 허우적 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에 대한 완전한 사죄, 완전한 용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믿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크신 사랑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쳐 흐르는 사랑을 받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자기를 알려주셨습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그 기준을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게 반응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순종에 기뻐하시고 우리의 불순종에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동이나 변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신 바대로 사랑하여 주십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을 바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미쳐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은혜와 평강에 대하여 무지하여 우리 속에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찾으려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우리 앞에 주신 이 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우둔함을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깨달은 대로 주신 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