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야고보서 4장 11절 - 17절 (21.11.22)

야고보서 4장 11절 - 17절

11절 :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절 :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절 :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절 :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절 :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절 :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절 :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제목 : 비방과 교만


문맥과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을 본문은 두 가지 선명한 주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11절에서 12절에서는 비방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13절에서 17절은 교만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비방하지 말라는 부분은 앞에서 부터 다루어 왔던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할 덕목들에 포함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13절에서 17절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함께 다루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행함으로 드러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산다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보여야 할 태도를 함께 배워보도록 합시다.


본론1 : 비방하지 말라 (11절 - 12절)


11절에서는 형제들아 하고 편지를 받아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부릅니다. 앞서서 4장 3절부터 10절까지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간음한 여인들아, 죄인들아,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하고 불렀지만 이제 주제를 바꾸어서 좀 더 부드러운 권면을 하기 위하여 형제들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방이라는 것은 반대 발언을 하다라는 의미이고 좀 더 의미를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여러 종류의 해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비방은 사람에 대한 공격과 판단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형제를 공격하는 자이고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형제를 거부하게 됩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율법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 완성하신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되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일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일이며, 율법의 중요함과 유익함을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는 일입니다. 율법은 준행되어야 하지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에서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라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율법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은 율법의 유일하신 입법자이자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만 능히 구원하시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영혼과 육체를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결정권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생사화복의 주관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웃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이지 비방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만 율법의 입법자이시며, 재판관 이십니다. 우리는 율법의 준행자일 뿐입니다. 


본론2 : 교만하고 허탄한 자랑 (13절 - 17절)


13절에서는 들으라라는 말로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야고보가 들으라고 말하는 대상은 너희 중에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떤 도시에 가서 일년 간 머물며 장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 계획을 만들고 있으며 이익을 낼 것을 확신합니다. 미래는 자신들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고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다른 도시로 옮겨다니며 장사를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이야기 하는 상인들은 꾸며낸 이야기 이지만, 편지를 받아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일상적인 이야기 였을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돈을 벌 것이라 자신감 있게 계획을 세운 상인들에게 야고보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려줍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계획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렇게 바꿀 수 있다고 자만하였지만 사실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상인들이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창고에 많은 곡식을 쌓아 두었다가 죽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결국 사람의 목숨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수 있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15절에서는 도리어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도리어는 14절보다 13절을 연결시킵니다. 13절에서 상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말하지 말고 도리어 주의 뜻이면 이라는 말을 덧붙이 라고 말합니다. 주의 뜻이 안개와 같이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서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나 계획을 세울 때나 모두 하나님의 뜻, 주의 뜻을 고려해야 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6절에서는 상인들의 예시에서 편지를 받아 읽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이제도 라는 말은 편지를 받아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 허탄한 계획을 세워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허탄한 자랑을 하는 자들이 야고보의 편지를 받아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장사할 계획을 세우는 상인들과 같이 자기 능력과 계획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뢰는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를 더욱 드러내는 오만함의 표현입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멸하시도 하시는 분이 오직 한 분 뿐이신데,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악하다는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습니다.


17절은 그러므로 하는 말로 시작하며 오만하게 하나님의 뜻을 제쳐두고 자기 부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를 더욱 쌓는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입니다. 상인들은 하나님의 뜻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이익을 보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집중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기 뜻을 율법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상인들로 하여금 재물을 허락하셔서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상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주님의 뜻, 율법 


지금까지 비방함과 교만함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형제와 이웃을 비방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비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전제로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전제가 우리를 그리스도 인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불편해보이고 전혀 기쁨이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율법을 기뻐하도록,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이 행복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죄악으로 변질된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이 사랑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감을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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