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원의 창시자
지난 문맥
히브리서는 알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저자가 로마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위하여 쓴 설교와 같은 편지입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네로 황제의 핍박 가운데 있었고, 복음에 대한 감격을 잊어 버렸으며, 모이기를 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어려움을 복음의 위대함에 대해서 설교하며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탁월하고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전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아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으며 다른 어떤 선지자들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전해준 천사들보다 더 탁월하신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을 통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흐름에 흘러 떠밀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천사보다 못한 모습으로 오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뛰어난 대제사장이 되시며,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함께 말씀을 찬찬히 읽어나가며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던,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
본론 1 :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5절 - 9절)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 장차 올 세상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일 뿐입니다. 아들인 그리스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아들에게 복종할 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그리스도에게 그의 왕좌를 내주었고 권한을 주셨습니다. 천사들은 다만 그리스도 앞에 순종할 뿐입니다.
6절에서부터 시편 8편의 인용이 등장합니다.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설교와 같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구약 본문을 가져와서 그 말씀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는지 어떤 것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셨는지 말씀하여 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시편 8편을 읽을 때 파악한 내용과는 사뭇 다른 내용으로 시편 8편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하고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메시야에 대한 내용으로 시편 8편 말씀을 접근합니다.
시편 8편에 등장하는 사람은 죄에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사람을 인자라고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인자라는 호칭은 일상적인 상태의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이상적인 상태의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이상적인 인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시편 8편 말씀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7절과 8절 앞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인자를 어떻게 하셨는가? 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잠깐의 십자가 고난 이후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 관은 관으로만 장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만물이 그의 발 앞에 복종하도록 하셔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 사실을 8절 뒷 부분과 같이 아직은 보지 못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이십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신 자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 받음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계획하시고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에 순종하셨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아들 스스로가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론 2 : 구원의 창시자 (10절 - 16절)
만물이 그를 위하여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 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묘사할 때 한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창시자라는 말은 구원을 창조한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앞서 가면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원래 창시자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에게 붙혀진 칭호입니다. 어려움과 절망에 빠진 자들을 구해내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대신 싸우시는 용사이셨습니다. 그 역할이 이제 예수님께 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영광스러운 승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완전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단 한번 드려진 온전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등장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죄인이었던 자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와 죄인은 양립할 수 없지만 모두 다 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자들을 형제로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구원한 자들과 동일시 하시면서 구원의 창시자의 역할을 다 하십니다.
12절에서 13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의 창시자로 세우시고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형제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부분을 성경을 인용합니다. 처음 인용하는 구절은 시편 22편 22절 말씀입니다. 일부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시편 22편 전체를 인용할 수 없어서 결론 부분만 인용하였습니다. 22편은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홀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셔서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시고 또한 교회로 불러 주셔서 모든 구원을 계획하시고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사야 8장 17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를 형제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인용된 세 번째 말씀도 이사야 8장 18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8장의 문맥에서는 자녀가 가리키는 대상은 선지자 이사야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 받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상반된 의미인 것 같지만, 이사야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이 이루어질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형제로 여겨 주십니다.
14절에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동일시에 대해서 더욱 이야기 합니다.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하였던 것처럼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서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에 속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이 가진 모든 성질, 즉 인성을 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앞서 1장에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이제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인성을 취하신 구원의 창시자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인성을 취하셨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한 죽음입니다. 온전한 인성을 취하셔서 온전한 사람이 되셨지만, 평범한 사람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결과, 형벌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죄 없는 죽음입니다. 죄 없이도 죽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시며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한 위대한 승리 입니다.
15절에서는 14절에 이어서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효력을 나타내는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을 무서워하며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죽으신 죽음입니다. 죽음의 주인이 우리를 형제로 여겨주시는 예수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출애굽 시대에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에게서 승리하시고 홍해로 군대조차 박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를 두려워 하지 않았듯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절에서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천사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우리와 같이 되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두렵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본론 3 :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17절 - 18절)
17절에서는 구원의 창시자이시니 예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신 이유에 대해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형제들과 같이 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직분 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제사장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하는 신실함이 요구되었지만, 자비함을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대로 제사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이시기 떄문에 자비하심을 이미 갖추고 죽음의 종이 되어 구원의 여망조차 없던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놀라운 자비에 신실하십니다. 변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십니다.
18절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 보다 더 탁월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전해준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위엄과 영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많이 강조되었다면, 이번에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서는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낮아지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시험 받는 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도와주실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결론 :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구원의 창시자를 보라!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오셔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마귀를 멸하시며 죽음의 종이 된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아지기 까지 낮아지시고 다시 높아지신 이 사실을 보며 우리가 겪는 시험들이 너무나 작게 느껴지며, 예수님께서 능히 해결하실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창시자를 보며,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을 보며 우리 앞에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죽음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렴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태수님 글 잘 봤어요~~. 역시 학자다운 글이네요~ 언제한번 청년부사역 관련해서 만나서 얘기나누면 좋겠어요~~
답글삭제ㅎㅎㅎ 과한 칭찬 이십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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