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6일 수요일

빌라도의 세 가지 질문 / 마태복음 27장 11 - 26절


마태복음 27장 11 - 26절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 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제목 : 빌라도의 세 가지 질문


재판은 계속되고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부당한 재판을 받으시고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 되자 빌라도의 관정에 끌려가셨습니다. 로마의 공식적인 회의는 해가 떠오르고 난 후에 진행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인 자들은 그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 총독 빌라도의 판결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자신들의 위법한 판결을 숨기기 위해 새벽부터 빌라도의 관정에 찾아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빌라도의 관정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 유대 지역의 군사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진 권력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제국의 변방에서 저항이 극히 심한 유대인들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공무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판결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판결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산헤드린 공회는 가야바의 집에서 시행된 재판에서 예수님의 죄를 신성모독 죄로 판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죄로는 로마 법정에서 그들이 원하는 십자가 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죄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였습니다. 그 죄는 바로 반란 모의 및 음모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며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고 자주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말입니다. 두 단어의 조합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런 근거를 들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하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을 준비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여러 사람들의 폭력과 제자들의 배신으로 지치고 상하신 예수님을 보고 심문을 시작합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고발한 내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총독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확했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에 대해 더욱 자세히 고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고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고발한 내용은 거짓으로 지어낸 내용이거나 조그마한 사실을 부풀려 지나치게 과장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에 그들이 한 거짓 고발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한 내용인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고발 내용인 유대인들을 미혹했다는 문제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미혹하여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시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말씀이 그들 눈 앞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몇몇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오해하여서 정치적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자기 열심을 보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시며 율법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려주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무거운 장로들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고발 내용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문제를 살펴봅시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악의적으로 조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 받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시고 데나리온에 새겨진 글과 그림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데나리온 금화에 그려진 글과 그림은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이며 황제 가이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이 돈의 주인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이 발언을 자르고 악의적으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이 고발 내용은 무효입니다.


세 번째 고발 내용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칭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르라고 강요하시는 일은 하지 않셨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다윗의 자손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로마 제국을 몰아낼 대안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떠받들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도를 거부하시고 오해를 풀어주시고 자신은 고난을 받아 죽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고 보호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진리를 품고 있는 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마음에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부로 받는 치욕적인 모욕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침묵으로 견디셨습니다. 이 고통은 어떤 육체적은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재판관 빌라도는 직감적으로 예수님께서 고발 당한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거짓 고발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시는 예수님에 대해 빌라도는 매우 놀랍니다. 왜냐하면 유창한 웅변과 수사로 상대를 완전히 밟아 이겨야 하는 정치 무대가 일상이었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의 침묵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침묵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다는 사실과 그들이 고발하는 내용은 거짓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길 원하느냐?


빌라도는 무죄한 자를 죽이는 무도한 재판관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격언 중에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형사소송법에서 무죄 추정의 원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뿌리입니다. 거짓으로 고발하는 상황이 의심되는 가운데, 빌라도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18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재판에 넘긴 것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새벽부터 몰려와 고발한 만큼 큰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줄 명분과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중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시도했습니다. 당시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바라바 또한 유대인으로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죄로 잡혀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비슷한 죄로 고발당한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고르게 하면, 실제로 죄를 짓지 않은 예수님을 풀어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도 예수님 때문에 꿈을 꿀 때 시달렸다고 이야기 하면서 빌라도의 생각은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으로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두 번째 질문을 준비하였습니다.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리에게 권하여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말했습니다.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따라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모든 계획과 의도는 무너졌습니다. 무리는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쉽게 선동되어 아무 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실제로 반란의 죄를 지어 갇힌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선하고 공정하고자 했던 의도는 실패했습니다.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을 분명 놓아주려는 마음으로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법학에 대해서 배운 대로 무죄한 피고인을 풀어주는 것이 그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왜곡된 결과를 낳았습니다.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려야 할 의무와 책임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떠맡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빌라도의 마음을 아셨을 것이고, 자신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이 예수님을 더욱 괴롭게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빌라도는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 죄 없는 사람을 어떤 범죄 사실로 어떤 벌을 주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이 또한 무리들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합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세 번째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빌라도는 무리에게 모든 판결권을 넘겼습니다. 그는 죄 없는 피고인을 풀어주는 무도한 재판관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재판관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판결 권한을 무리에게 맡긴 무책임한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빌라도에게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었다가는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골칫거리 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다양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공인해주어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으면 통상 거래가 불가한 로마 사회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유대 지역 내에서 산헤드린 공회에 제한적이지만 자치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율법을 기초로 유대인들의 송사를 판결하였고 로마는 그 판결을 존중하였습니다. 유대인들끼리 내는 성전세를 인정하였습니다. 율법이 정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지금이나 주 5일, 주 4일이라는 말이 있었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언제나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인정하고 그들이 안식일을 규정에 맞게 보낼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습니다. 로마는 이토록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서워 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대 총독으로 파견 받은 빌라도는 민감한 유대 지역 내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눈 앞에는 죄 없이 벌을 받아야 할 무고한 예수님이 있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로마 제국에서 특별히 관리되고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정의를 지키는 재판관이 되기 보다는 민란을 다스리는 행정관이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 물에다 손을 씻으며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임은 완전히 없지는 않습니다. 재판관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 중 예수님의 고난을 고백할 때, 항상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에게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손을 씻는 빌라도를 본 무리들은 더욱 흥분하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죽였던 무리들과 그 자손들은 그 피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무너졌고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성전이 재건되는 일이 없었고 유대인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지내게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법도 없고 정의도 없는 엉망진창 재판이 마치고 선고된 결과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받기 위하여 군병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 대신 바라바는 무리에게 놓아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였습니다. 이미 십자가 처형이 결정된 예수님께서 채찍질을 당하셨던 이유는 로마 제국의 법의 엄준함과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 법 체계 안에서 가장 극형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십자가형을 당할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한 본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십자가형이라는 형식에 욱여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당할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예수님께서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직접 무리를 선동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십자가에 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덮어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시고 로마 제국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종


마태복음은 여기서 빌라도의 심문과 심판은 끝납니다. 이 짧았던 심판은 약 8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거짓 증인과 진술로 억울한 처지를 당할 때에 그의 입을 열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 괴로움을 견디셨습니다. 그 모습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모습,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 곤욕과 심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에게 있지 정작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모조리 뒤집어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허물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가 받아야 했던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결말처럼 그 목숨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고난의 값을 치루셨습니다. 또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했던 양과 같이 자기 털을 주인에게 준 양과 같이 자기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부패하고 더러운 우리에게 의로움이라는 거룩하고 깨끗한 옷을 입히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이유와 힘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고, 당장이라도 열 두 영이나 되는 천군을 동원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습니다. 언제라도 이 불의하고 불법한 재판을 뒤집을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과 결심을 이 긴긴 고난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서 54절 말씀입니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이 고통과 수치의 상황에서 구하려고 검을 뽑은 어떤 한 제자를 막아 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고난이 꼭 필요합니다. 죄악과 사망의 그늘 아래서 우둔한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갈길로 가버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수치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라면 감당하지 못할 고통과 수치를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고 감당해 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님에게는 빌라도가 던진 세 질문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법과 원칙 위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내어 공정한 판결을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억울한 피고인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를 둘러싼 유대인 무리를 두려워하며 무리의 마음에 들도록 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견디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견디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사도 바울의 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 입니다.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교회인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겪게 되는 고난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한창 교회를 핍박할 때에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 앞에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받는 고난과 핍박이 모두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받으신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함께 채우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와 기쁨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증인의 삶을 살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귀한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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