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4일 수요일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 우리는 그의 것 / 시편 100편 1 - 5절

시편 100편 1 - 5절

1 [감사의 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제목 :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 우리는 그의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로마서 1장에서 3장을 읽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변호할 여지가 없는 죄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죄인입니다. 헬라인들은 순리를 따르지 않고 어그러진 양심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계시된 율법이 있었으나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신을 따랐습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읽는 열왕기상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왜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받았는지, 그들의 죄가 얼마나 명확한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선한 왕들을 세우셔서 백성들을 돌이키려고 하셨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죄에 빠져버렸고 돌이킬 수 없어 마침내 멸망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토록 하나님 앞에 인간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죄를 한 치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완전무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다릅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고 요청합니다. 시편 100편 말씀을 중심으로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시편 100편은 시편 93편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하는 시편들을 마무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00편에 사용된 단어와 문장은 표면적인 의미만으로 생각하면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온 세상의 왕 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관점에서 이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시를 시작하면서 온 땅을 부릅니다. 온 땅이라는 말을 그냥 읽으면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상 만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온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것인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찬양하길 원하십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며 모이길 원하시지만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온 땅에 포함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온 땅의 구성원인 모든 인류는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찬송도 영광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지은 죄의 결과로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땅 또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온 땅의 구성원인 인류를 제외한 모든 피조물도 인류가 범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죄라는 저주가, 죄라는 적군이 인류를 포함한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


시인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도록 온 땅을 초대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고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즐거운 찬송과 기쁨은 각각 따로 쓰일 때는 말 그대로 즐거운 찬송과 기쁨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된다면 의미가 조금 한정되게 됩니다. 이 한정된 의미가 온 땅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1절의 즐거운 찬송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 군대 진영에 들어와서 온 이스라엘이 승리를 확신하며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에스라 3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 기초를 놓을 때 큰 소리로 찬양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즐거운 찬송이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친히 이루셔서 그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혹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찰 때에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의 모습을 잘 표현한 단어 입니다.


2절의 기쁨은 사무엘상 18장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환영하면서 이스라엘 모든 성읍의 여인들의 노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역대하 20장에서 여호사밧 왕이 브라가 골짜기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함께 그 승리의 현장에 있었던 백성들이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1절의 즐거운 찬송과 2절의 기쁨이라는 단어를 조합해보자면,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왕이신 하나님께서 죄라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적군에게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에게서 약속대로 승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초대 받은 온 땅은 하나님 앞에 즐겁게 나아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릴 즐거운 찬송과 기쁨은 복잡한 추리 소설을 읽는 기쁨이나,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듣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던 죄라는 방해물, 그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적군에게서 승리하여 누리는 아주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의 왕께서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찬송합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즐거운 찬송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길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3절에서 시인은 “우리”라는 말을 꺼냅니다. 1절에서 시인은 분명 “온 땅”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청하였습니다. 온 땅이 전부 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시인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라고 말하며 초청 대상을 온 땅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 범위를 좁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어다 라는 문장이 예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6장 7절 말씀입니다.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절정은 홍해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홍해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애굽의 전차 부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 잡으려고 달려올 때, 불기둥으로 그들의 진격을 막으시고 홍해를 가르신 후, 홍해를 합치셔서 애굽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셨고 자기 백성을 위해 승리하셨고 자기 백성을 적들의 손에서 완전히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건너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크게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이유가 더욱 명확해 졌습니다. 출애굽의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소유 삼으시고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 다스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등식이 여기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소유 삼으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여기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시는 이유를 하나의 시상으로 형상화 합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목자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기르시는 양이라는 시상 입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는 시편 전반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비유할 때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왕의 통치 행위와 양을 돌보는 것은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모으고 양을 지키고 양을 먹이는 일은 왕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직무와 같습니다. 


자기 백성의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양을 돌보시길 끝까지 돌보셨습니다. 심지어 그 양 떼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흩어지게 되어도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양 떼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예레미야 50장 17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17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1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흩어진 양 떼를 아끼셨습니다.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들을 내버려 두실 수 있으시지만, 성실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양을 노리는 사자 무리를 물리치시고 양들을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그의 것이며 그의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문과 궁정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흩어지고 죄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를 죄에게서 승리하시고 다시 모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시인의 초청에 따를 수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릅니다.


시인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초청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그의 문과 그의 궁정은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어 바쳤던 성전을 뜻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곳 입니다. 이미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한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들어와서 감사와 찬양을 올리라고 초청을 받습니다. 


출애굽 이후 만들어진 성막은 제사만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언제나 하나님께 찬송과 함께 제사가 올려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대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 56장 6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성전은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죄에게서 승리하신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열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모든 자를 성전으로, 자기 앞으로 초청하여 제사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찬송도 받으시고 기도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시인의 선포, 시인의 초청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기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온 땅을 자기 앞으로 부르시고 자기 백성을 지으시고 소유 삼으시고 자기 백성 삼아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선하다는 말은 착하다, 좋다 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은 시인이 노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자하심은 우리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친절과 자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제물과 복잡한 의식으로 만족을 모르는 이방 신과 우상과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존재를 숨기지 않으시고 들추어 보여주셔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명확히 가르쳐 주시고 기록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 자기 살을 베고 자기 아들을 태워드려야 하는 그런 불행한 처지에 놓이지 않도록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실하심은 우리에게 견고한 믿음과 확고부동한 신뢰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으로 베푸신 자기 말씀을 결코 변개하지 않으시고 그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반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방신들과 우상들은 자기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리며 그 추종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것에 벗어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를 것이라 노래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노래할 이유입니다. 그의 문에 들어가고 궁정에 들어가서 찬송과 감사를 드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그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의 효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같이 영원하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같이 대대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지금까지 시편 100편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방법은 본문에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명백한 승리 위에서 즐거운 찬송과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곳인 성전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찬송과 기도 등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온갖 감사와 찬송의 표현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인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말고 이미 승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그 성품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십자가와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는 형틀이 아니라 승리의 깃발이 되었고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부활을 향한 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멈추지 말고 찬송하길 멈추지 말고, 기도하길 멈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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