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5편 11-20절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목 :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
죄와 벌, 선과 상 그 애매한 기준선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명확한 기준 없이는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죄이고 선일까?, 무엇을 벌로 하고 상으로 할까? 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 애매한 기준들에 나름의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노력은 법과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한 법과 규칙은 그 나름대로 기준으로 가지고 각 사람들의 선과 악을 판단하고 벌을 받을지 상을 받을지 판결합니다. 고대 시대에는 왕과 같은 지도자가 법과 규칙을 정하고 판결도 하고, 집행도 하였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사회가 복잡해지는 것에 따라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가 분립되어서 서로를 견제하며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삼권분립이라는 체제가 고안되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법과 규칙을 수정했고 또 하고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선과 악이 뒤바뀌고 벌이라 생각했던 것이 상이 되고 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벌이되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이 사회 속에서 절대적인 법도 규칙도 없습니다. 그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때 어떤 도구를 가지고 범죄를 저질렀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했는지 모든 것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변수가 됩니다. 기준이 되는 법과 규칙은 있지만, 상황과 형편에 따라 적용되는 범위도 효력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재판이라는 과정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그 재판도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판결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완전한 결과가 아니라 완전하지 못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정한 규칙과 법은 결국 상대적입니다. 모든 상황에 변하지 않고 적용되지 못하는 불완전한 법과 규칙입니다. 이토록 불완전한 것이 우리 행동과 생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불완전한 것을 붙들고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우리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일입니다. 변하지 않으시길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따르고자 우리에게는 불편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찌해야 할지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시인의 고백, 나는 죄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다윗이 지은 시편입니다. 이 시편이 지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시편 25편 전체를 읽어보면 국가적인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함께 기도하고자 하여 지은 시편으로 보입니다. 대적들과 원수들이 몰려와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할 때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길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앞 단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가 11절에 이르러서 갑자기 자기가 지은 죄가 크다고 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죄는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즉 모세가 전한 율법 조항들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전한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법의 개념과는 조금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속법이나 율법이나 그 구성은 비슷합니다. 범죄로 규정되는 어떤 행동을 금지하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주어지는 처벌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하지만 세속법과 율법은 기능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속법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 번째는 범죄 행동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기능입니다. 두 번째는 법이 정한 범죄 행동을 해당하는 벌로 억제하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 번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지는 특별한 기능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는 기능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어떤 백성이 되길 원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 때문에 우리는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율법 앞에서 항상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부족하게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은 형제끼리 미워하지 말고 라가라 서로 욕하지도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해주신 율법 앞에서 다윗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자도 결국에는 죄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며 엎드립니다. 이것이 세속법과는 다른 율법의 또 한 모습입니다. 범죄자는 경찰을 피해다니며 잡히지 않길 노력합니다. 재판정에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범하고 율법이 전한 하나님의 뜻에 부족하게 순종한 죄인들은 오히려 그 법의 근원이시고 심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죄를 사하여 주실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크다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여 주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우상을 지어 자신을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며 앞으로도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 - 7절 말씀입니다.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며,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다윗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용서해주시길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드리는 성막을 만들 수 있도록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죄를 범한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일은 잠언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이 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겸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길, 즉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 보상은 엄청납니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자손들이 땅을 상속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평안히 살며, 그 땅을 자기 자손에게 순적히 물려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군대를 일으키셔서 그들을 치셨고 그들을 평안히 살지 못하게 하셨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셔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기업을 이어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이름을 걸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각한 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언약 백성의 자리에서 제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브라함 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언약을 제일 처음 하나님께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대해주실 것입니다. 그가 바랄 수 없을 때 바란 것을 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어떤 구원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환란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구해내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상황을 그물에 걸린 발이 걸린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물에 발이 걸린 자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복된 일인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압니다. 하지만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 일을 매우 외롭고 괴로운 길입니다. 이 일은 누구도 잘 알아주지 않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9장에서 한 지혜자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혜 있는 자에게 있는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솔로몬은 어느 날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의 이야기 였습니다. 큰 왕이 그 작은 성읍으로 와서 그것을 치며 성읍을 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작은 성벽 옆에 큰 흉벽을 쌓아 성 안을 잘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치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 작은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큰 왕의 공격을 그의 지혜로 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읍 사람들은 큰 왕에게서 구원함을 얻었을 때는 자신을 구한 지혜자에 대해서 칭찬하고 기억할 것이라 이야기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들을 구해준 지혜자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전도서 9장 16절에서 19절 입니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지혜는 큰 왕의 많은 군사보다 성벽보다 크게 쌓은 흉벽보다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는 우매한 자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쉽게 잊혀지고 인정받지 못하고 도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한 가난한 지혜자가 이룬 구원은, 그 성과는 쉽게 잊혀집니다.
다윗 또한 시편 25편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동안 외롭고 괴로운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속에서 삼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사 근심이 많은 곳에서 이끌어 내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해 주신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자들을 기억하시는 어떤 왕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왕은 다른 분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심판하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은 그 앞에 모여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각 사람을 구분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임금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임금이 하는 말을 듣고는 전혀 임금에게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언제 그런 일을 하였는지 되물었습니다. 임금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여 주셨습니다.
임금은 이제 왼편으로 고개를 들어 염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오른편에 있던 양들과는 반대의 일을 하였습니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왼편에 있었던 자들도 우리가 언제 그 일들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임금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임금께 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9장의 작은 성읍 사람들은 가난한 자가 베푼 구원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알아봐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마땅한 상과 벌로 판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땅한 것으로 갚아주시는 완전하시고 공평하신 재판관이십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 시편 25편 말씀을 통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뿐만 아니라 부족하게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너무 까다로운 조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범죄자로 두지 않으시고 죄가 아닌 삶을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비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어진 대로 나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낫게 여기는 겸손,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가져야 할 당연한 마음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이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상을 생각할 때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더 나아가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같이 친밀하게 우리를 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기억해주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억해주시며 합당한 것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완전히 돌이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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