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 시편 42편 1-11절


시편 42편 1-11절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항상 신앙고백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고백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며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도가 교제하는 모든 곳에 계십니다. 우리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하고 기도한 내용대로 그 곳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고백하고 기도하지만, 우리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면서 수군거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어디 있느냐는 말 못할 고민들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시편 42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어느 사람의 노래입니다. 이 사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어디에서도 찾아 뵐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기도하며 찾습니다. 시인이 찾은 답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을지 시편 42편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합시다.


고라 자손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 입니다. 고라는 레위의 아들 고핫의 아들이며 아론과는 사촌 지간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고라는 르우벤 지파와 더불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이스라엘이 온 회중 가운데 계시고 온 회중이 다 거룩한데 왜 아론과 모세만 지도자의 역할을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틀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중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모세를 택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라의 반역은 아론과 모세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그들을 택하시고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땅에 삼켜지는 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고라와 그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은 땅에 삼켜지는 벌을 받았지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버지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죄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죄는 아들에게 물으시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레위인의 사명 또한 박탈당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 자손에게 주어진 고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고라의 자손들은 고핫 자손이었기 때문에 성소 안의 집기를 관리하고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성막이 존재할 때까지 고라 자손들은 고핫 자손들의 임무에 따라 행하다가 다윗 왕조가 들어선 때 이르러 성막을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을 때에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라 자손들이 다윗 시대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게 됩니다. 일부는 성전 문지기를 맡고, 일부는 진설병에 올릴 전병을 굽는 일을 맡았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찬양대를 맡아 하나님 앞에 찬양하였습니다. 고라 자손은 그들의 존재 만으로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찬송 제목이었습니다.


고라 자손들이 지은 시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죄와 현재 받고 누리고 있는 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시편 42편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라 자손은 이 시편을 지으면서 이 시편의 종류를 마스길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마스길이라는 말은 성공하다, 이해하다, 현명하게 대처하다 등 여러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정확한 내용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개역개정 성경에서 번역한 것처럼 어떤 교훈을 전하는 시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이 지나온 배경을 알고 읽을 때 시편 42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냇물을 찾는 사슴


고라 자손은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졌지만, 너무나 강렬한 심상을 그리며 시작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게 찾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직접  마시고 싶은 이유도 있겠지만, 시냇물 근처에는 사슴이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건조한 가나안 땅에서 흐르는 물을 찾는 일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꼭 필수적 입니다. 그만큼 시인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일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시인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하나님을 찾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은 일을 위해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매일 세 끼 음식을 먹듯이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시인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고 종일 사람들이 묻습니다.


사람들의 질문은 시인의 고통을 더욱더 가중시켰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도로 질문하지는 않았겠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의도를 가지고 질문하였을 것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이 정도의 고통도 해결해줄 수 없는 무능한 신인가? 하는 의도입니다. 사람들은 고통 당하는 시인을 보면서 하나님을 그토록 믿고 의지한다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할 능력도 돌아볼 여유도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두번째는 시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도입니다. 두 의도 모두 시인을 괴롭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미워하지도 그 앞에서 큰 죄를 짓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과거 한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 때에 시인은 사람들을 이끌고 동행하며 하나님 집으로 나아가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결코 능력이 부족하시거나 주의력이 부족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시인 스스로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을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고통 가운데 있으며 이 고통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쓸데 없는 오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 것인지 사람들의 질문이 자기의 질문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인은 그토록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마음 다해 노래하는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 계셨습니다. 고라 자손들이 성전에서 문지기를 하고 진설병에 올릴 전병을 굽고 찬양대의 사명을 감당한 것은 그 곳에 계시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슬픔과 고통에 의해 무너질 것 같은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우실 것이며 여전히 찬송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저 멀리 요단 강 상류 헤르몬 산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기억합니다. 헤르몬은 요단 강 상류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2,800m의 높은 산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릴 눈과 비가 요단강의 주요한 근원이 됩니다. 시인이 언급하는 미살 산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헤르몬 산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 들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사실 헤르몬 산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벗어난 저 멀리 북쪽 경계에 있던 산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곳에 있는 폭포와 깊은 바다가 서로 합치며 소용돌이치며 파도와 물결이 일어나는 장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또 그것에 집중하다가 휩쓸렸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 일을 체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도 계셨지만 헤르몬 산에서도 함께 계셔서 시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시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자하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언제나 어디서나 지키셔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밤은 언제나 낮이 되고, 낮은 언제나 밤이 됩니다. 낮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베푸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낮이 오듯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신실하신 사랑을 베푸신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시는 시간인 낮이 지나고 언제나 낮 뒤에 이어지는 밤에 하나님께 주신 것으로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나의 질문이 대적의 질문과 일치될 때


시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반석으로 고백합니다. 반석은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에 대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고난에 두셨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두고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하며 기도합니다. 시인은 방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헤르몬 산의 일을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스스로의 죄책감이나 질병으로 인해 아픈 것이 아니라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괴롭습니다. 그들의 압제는 시인을 슬픈 나날들을 보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뼈를 찌르는 고통처럼 엄청난 고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압제하고 괴롭히는 원수도 나와 같은 질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시인은 대적의 질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5절에서 했던 자기 스스로를 향한 명령을 반복할 뿐입니다. 우리는 결국 시인이 어떤 답도 얻지 못한 것이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구호만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분명히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여호와의 성일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기쁨과 감사를 큰소리로 외치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갔던 일을 기억합니다. 언제나 오는 낮과 밤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찬송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신실하셧고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낮과 밤이 변함없이 반복되는 것 같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백하는 바와 같이 내 반석이 이십니다. 


내 백성을 다시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의 고백을 개인적인 고백으로 마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고레스 왕을 보내시고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까지 이스라엘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며 비아냥을 듣고 스스로도 질문하였습니다. 또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돌아왔지만 성전의 기초를 쌓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지낸 16년 동안도 수 많은 질문을 받고 실제로 방해를 받으며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를 스스로도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포기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 8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도덕적 정결함이나 종교적 순결함을 보고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함께 계시며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더 이상 전쟁이나 질병으로 치지 않으시고 늙은이들도 그 성에 가득하고 어린 아이들도 그 성에 가득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과 환경에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손을 견고하게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프고 힘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들을 찾아 가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질병과 아픔 가운데도 함께하셨지만 우리의 대적 사탄에서 고통 당할 때에도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 말씁니다.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사의 흐름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신 것이 먼저이고 귀신 들린 자 두 명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뒤에 위치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오셔서 귀신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이 자를 만나기 위하여 호수 건너편에서 건너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 몰아 넣으시고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귀신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던 두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거기 오시고 거기 계시므로 그 모든 괴로움이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에 대해서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생깁니다. 귀신 들린 자들은 자유를 얻고 기쁨에 충만하였을 테지만,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돼지 떼를 몰살 시킨 그 권능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가 기쁨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거부로 결론났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그 아픔을 함께 하시려던 예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재와 임재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


지금까지 시편 42편을 중심으로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갇힌 신앙인의 고백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우리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통해 매번 고백하지만 막상 고난과 고통 중에 처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기억을 되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억에 의지하며 또한 역사 속에서 성경 속에서 언제나 함께하시고 다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와 함께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약한 자, 병든 자와 함께 계셨고 괴로워하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즐겁게 맞이하며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 진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만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두려워하며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예수님을 맞았던 자들은 끝내 바라고 소망하던 자유를 찾았을 때도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편 저자처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기도가 언제나 우리 입에 맴돌며 낮은 소리로 항상 읊조리는 기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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