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초대 교회, 인간다움을 전하다. 『기독교의 발흥』을 읽고


 최근 Mnet 이라는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프로듀스 101”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각 연예 소속사의 연습생 101명을 대상으로 서바이벌을 벌여 끝까지 살아남는 11명에게 아이돌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서바이벌은 시청자의 투표로 이루어졌고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투표를 통해 자신의 관심을 표시하였다. 101명의 연습생들은 가수로서 가지고 있어야할 노래와 춤 실력에서 극복하지 못할 만한 큰 차이는 없었다. 그들을 줄 세웠던 것은 그들의 외모와 이미지였다. 그들을 투표하는 시청자들은 그들이 TV에 비춰진 모습과 의도된 연출들을 통해서만 그들을 접하고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외모만으로 그가 보여준 행동의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곳에서 나오는 가수의 자질을 시청자들은 보지 못한다. 연출적인 재미와 화면 구성 상의 문제 때문에 비춰지지 못하는 연습생도 많았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TV에 비춰진 모습을 가지고만 그들을 판단하고 투표하였다. 그리고 각 연습생의 득표수는 가장 공정하고 의미 있는 판단 기준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 수가 그들이 미래에 창출해낼 수익이고 지금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정하고도 엄정한 기준 앞에 탈락하는 연습생들의 반응 또한 시청자들이 투표하는 기준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볼거리, 즐길거리로 여기는 비인간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돌 가수에게 자신이 대중의 볼거리로 여겨지는 수치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 자신의 실패와 직결된다. 대중이 얼마나 그를 좋아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가 하는 행동에 대중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 한 아이돌 가수의 성패가 달렸다. 실력보다는 호감도에 따라 그들의 성공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는 우리의 현실이 정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한 측면들에 호감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품으로 소비한다. 질리거나 잊혀진 것들은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성장하고 있었던 로마 시대에도 이런 인간의 비인간화가 만연한 시대였다. 사람과 사람으로 숨 막히는 도시이지만 도대체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힘들었던 고대 로마. 그 곳에서 우리 초대 교회는 성장했다. 이 책 “기독교의 발흥” 은 고대 로마의 사회와 문화상을 재현하여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급성장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시선으로 요인들을 분석하는 책이다.

 이 책은 도발적인 명제로 시작한다. 초대교회의 성장은 매우 지극히 평범한 성장률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초반부에 나오는 베드로의 예루살렘 전도활동 외에는 현재 시대의 신흥 종교들이 성장하는 숫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신자들은 초대교회 시절에는 집단 개종이 흔한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곳곳에서는 성령님의 강림 이후 벌어지는 기적과 이적들이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이끌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항은 예수님의 경우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 5,000명을 빈들에서 먹이셨고 4,000명이나 되는 이방인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환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고작 120명이었다는 점이다. 성령님의 강림 이후 성령님의 능력은 사람들을 압도하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아주 적은 수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자신의 삶의 모든 양식과 생각과 동기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수는 아주 미미했으며 그것이 성장하는 속도 또한 다른 여느 신흥 종교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존재하던 종교들도 교회가 생길 즈음에 생겨난 종교들도 교회가 로마 제국에 용인될 때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왜 교회만이 기독교만이 로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교회의 단단한 두 개의 기반을 말한다. 첫 번째는 초기 기독교의 계급적 기반이다. 신흥 종교를 받아드리는데 있어서 교육 수준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저자가 책을 통해서 자세히 예증한다. 그 사실은 신흥 종교에 가까울수록 신자의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개방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 신흥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새로운 진리에 개방적인 지식층 즉 상류층에 잘 스며들었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이러한 점들을 잘 알 수 있다. 고린도의 재무관이었던 에라스도,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인 마나엔 등 고위 관리나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그 당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사도행전 곳곳에는 귀부인들이 믿었다는 보고를 많이 하는데 이는 귀부인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들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초대 교회시대 순교자들의 편지에도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조용히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자들 중에 그의 순교를 저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는 하층민의 종교라는 그릇된 편견을 깨버리고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모든 계층을 위한 종교이며 그들이 계층을 따지지 않고 주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로 묶는 끈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기독교는 비록 박해와 어려움을 받지만 상류층 신자들을 통해서 16세기 일본의 천주교 탄압과 같은 박멸과 같은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기반은 유대인의 선교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초대 교회 확장에 매우 걸림돌이 되었다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려고 여행을 떠나는 바울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른 이방 민족들이나 로마의 관원들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의 중요한 선교 전략은 바로 유대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아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고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하며 참된 위로를 찾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메사야가 오셨음을 전하는 복음은 어느 유대인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대인 회당에 모여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견고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회당은 곧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복음 전하는 자로 세워질 수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가 전파됨으로 유대인들의 폐쇄적인 민족성은 신앙이라는 올타리 안에서 없어졌다. 모든 믿는 자들은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이다. 유대인 선교의 중요한 의미는 종족과 민족을 뛰어넘는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단단한 두 가지 기반이 있다고 해도 기독교가 성장하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저자는 두 가지 기반이 있었듯이 두 가지 주요한 계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역병이다. 로마 시대의 역병은 매우 극심하였다. 인구의 30%∼40%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최고의 의사도 역병에 걸리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사람들이 없는 시골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의사조차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의 위생 수준과 관념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런 역병의 시기에 기독교도들은 도시에 남아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사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 하여도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신자들은 병자들을 버리고 멀리 도망쳤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죽은 병자들을 매장하였다. 시체를 매장하는 것은 시체로부터 나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을 줄이는 방법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역병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들의 체계를 만들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와 연관되어있지만 교리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신자들의 삶 자체가 서로를 돌보면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살았다. 이것은 비신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신자들 중에는 신자들의 돌봄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살아난 사람의 친척이나 지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사랑의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소원했었을 것은 자명하다.

 두 번째는 로마의 대도시 환경이다. 로마의 대도시는 수많은 인구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 살아갔다고 한다. 도시에는 수용 가능한 충분한 용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을 공공지역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름만 공공지역이지 대부분의 시설은 귀족들과 관원 그리고 군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수준 높은 문화와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다. 또한 도시의 구성원들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 정책에 의하여 또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생계를 위하여 모여든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서는 각 민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였다고 한다. 민족별로 거주구역을 나누어서 거주구역으로 각자의 출신 민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심각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유기해버리거나 살해하였다. 한 가정에는 한 여자 아이로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혼 풍습이 있어서 초경하기 전의 여자 아이를 부인으로 맞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혼하는 순간 여성의 모든 권리는 남편이 갖게 된다. 남편은 여성에게 임신 중절도 명할 수가 있었고 신생아의 유기 또는 살해를 명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인간의 절반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차별의 근저에는 로마의 이교적 다원주의가 있다. 그레코-로만의 모든 우상들은 제물을 요구하였다. 제물을 받고 자신의 능력에 맞는 복을 내려주었다. 예를 들면, 바다의 신 넵튠에게 제물을 바치면 항해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식이다. 이러한 점은 인간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신의 장난감이라는 인식을 준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서로를 조종하고 서로에게 받을 것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인간을 도구적인 것으로만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달랐다. 기독교의 신은 아무런 제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제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랑을 받은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신다. 그것만으로 신은 기뻐하였고 은혜를 내려주었다. 제물과 바꾼 제물과 거래된 복이 아니라 대가 없는 은혜였다. 기독교의 신은 그레코-로만의 신이해에서 벗어나는 신이었다. 누구도 그런 신을 만나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그 신을 믿는 교회라는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차별과 상처에 몸서리치는 많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공동체였고, 서로의 생명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공동체였으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로 받아드리는 공동체였다. 인간성을 상실한 고대 로마의 도시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신앙에 대한 교리의 우월성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 어느 누구라도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구원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이 인간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초대 교회는 진정한 구원의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의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해졌다. 순교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을 더욱 확고하게 보여준다. 순교의 모습은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신앙을 지키고 죽는다는 것은 그 신앙이 진리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신자들도 그들의 순교를 보고 감복한다. 그들의 신앙이 공동체를 통해서 발휘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사후에 있을 낙원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한 사람의 용감한 죽음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와 그 신앙에 대한 변증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강조한다. 인간다움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 대중매체들과 언론들은 인문학이 그 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학의 종말을 보았다. 인간 안에는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을 선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았다. 19세기 계몽주의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을 때에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대세였다. 인간은 무한히 발전하고 무한히 평화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이를 말해주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는 철학과 이성의 중심이었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 이다. 인간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할 수 없다. 인간 안에는 어떤 선한 것도 없다.

 이제 세계는 계몽시대를 넘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모든 것이 옳고 틀린 것은 없는 시대이다. 이런 생각은 고대 로마의 이교적 다원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직면하였던 세계와 비슷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대 로마에 있었던 계급간의 격차, 민족간의 차별, 여성 비하 등과 같은 사회적 환경은 개선되었거나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서론에서 말하였던 바와 같이 우리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도구로 여긴다. 인간은 인간을 한 상품으로, 가치로 여기며 공장 기계 속 톱니바퀴와 같이 살아가게 만든다. 겉으로의 차별은 줄어들었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차별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대 로마의 도시인들에게 인간답게 살도록 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회복시키려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대로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발흥은 인간성 회복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기독교의 가장 큰 보상이었다. 우리는 현대의 시대정신이 기독교를 파괴하는 심대한 위험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은 어느 시대에 존재하였고 특히 초대교회가 성장하던 고대 로마의 시대정신과 유사하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간직하였던 복음이 교리적 탁월성이나 반박하지 못하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참된 인간성 회복이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였고 우리 교회의 지향점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5월에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