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기쁨과 행복으로 이끄는 진리 『토마스 아퀴나스 사도신경 강해설교』을 읽고


현대는 인본주의의 시대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척도가 된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시간과 기술 그리고 자원만 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고, 통제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날씨에 대해서도 이미 마른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되었다. 과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이다. 과학적 지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활용하게 한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객관적 진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과학적 지식보다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실험과 시행 착오를 겪어가며 만들어낸 통계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헤겔의 정반합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한 지식이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도 반대되는 다른 한 지식이 나타나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에는 상호보완적으로 서로의 장점을 받아드리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좀 더 발전된 지식으로 합쳐지는 과정이 무한히 일어나 어떤 완전한 지식으로 무한히 발전해 나간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인류의 지식은 점점 나은 것으로 진화해 나가고 결국에는 완전한 지식에 이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의 발전은 토마스 쿤이 지적하듯 페러다임 전환에 의해서 발전된다. 어떤 한 이론이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도 다른 이론이 등장하면 지배해왔던 지식은 틀린 것이 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새롭게 시대를 지배하는 지식은 이전의 지식을 보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과 현대의 양자역학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소립자 운동과 일상적인 크기의 물체 운동은 하나의 통일되고 단순한 관계식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관계식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식은 없고 항상 불완전한 지식이 새로운 지식의 탄생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인 진리, 절대적인 진리라기 보다는 인간 자신이 자기주관적으로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지식은 인간이 고안해낸 도구와 측정 체계들로 도출되는 측정값들을 인간이 고안한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여 가공한 지식이다. 결국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기준과 도구를 통한 관찰로 축적된 측정값들에 인간이 주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만드는 극히 주관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즉,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양에서 인본주의가 주류가 되기 이전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대는 십자군 전쟁 그리고 절대적 교황권으로 대변되는 시대였다. 교회가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고 다스리던 시대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였고, 신앙으로 모든 학문을 수행하였다.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무슬림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플라톤의 사상으로 설명하던 기독교의 교리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척도이고 근본이며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설교 속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근거로 제시된다. 종종 예화를 들고는 있지만 그것조차 성경의 내용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된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만이 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이 책 “토마스 아퀴나스 사도신경 강해설교”는 철학적 사변과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또는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 시대의 도전들에 대하여 온전한 권위인 성경으로 정통적인 기독교 진리를 옹호하고 그것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말한다. 진정한 객관적 진리, 완전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자한 한 신학자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가 사도신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설명할 때마다 사도신경이 진술하는 사실이 진짜인가에 대한 증명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 속의 신처럼 어느 이데아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인간들은 그 신을 관조의 대상으로 관찰하며 자신들의 학문체계에 필요한 무생물적이고 비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나오는 질투하시고 사랑하시고 심판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살아서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상정한다. 그는 사도신경 강해를 시작하면서 하는 첫 설교는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그 사건, 그 진술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영향을 주는지부터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성경 속의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자를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셨기 때문이다.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쓰는 말을 하고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고 인간이 입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신앙의 핵심이다는 것을 밝힌다. 그의 사도신경 강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의 사도행전 강해는 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절반인 여섯 부분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다. 그의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은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의 설교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어려운 신학적 용어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사도신경의 항목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설교 내용은 그의 고향의 말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설교의 대상이 바로 고향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중세 유럽의 문맹률은 엄청났었다. 글자를 알고 있는 식자층 중에서도 소리내지 않고 책을 읽는 묵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고 한다. 그러니 설교를 듣는 청중의 수준을 고려하여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예화들 그리고 성경구절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표현하는 것에도 그의 명쾌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는 예수님을 왕의 명을 적은 칙서라고 표현한다. 칙서를 찢은 백성은 왕에게 반역을 도모한 것이므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을 살아가던 청중들에게는 이것보다 와닿는 표현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많이 설명하였듯이 그 스스로도 고매한 파리 대학의 교수를 지나는 학자 모습과 학문으로 수도하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사의 모습을 버리고 자신의 설교를 들으러 모여든 청중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과 같이 그도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단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말한다. 이단적 사상은 인간 스스로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으로 제한하거나 부풀린다. 하나님의 진리는 객관적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주관적인 진리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단의 생각을 비판할 때에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가지고 비판하지 않고 바로 성경 말씀으로 반박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오류라고 말한다. 철저히 이단으로 배격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언제든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돌아 올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전제해 둔 것이다. 친절하게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밝히 말해준다. 또한 이단의 논리와 체계를 반박하며 우리가 믿어야 할 바를 더욱 분명히 말해 준다. 특히 성육신에 대한 이단들의 오류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을 할애하여 반박한다. 포티누스의 양자 기독론, 사벨리우스의 성부 고난설, 아리우스가 주장했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까지 다른 어떤 교부들의 말을 빌려서나 신학적인 공리들을 동원하여 논리적인 체계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변증이나 반박이 아니다. 그는 이 사실과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한 일인지 행복한 일인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행복한 일이고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는 그의 주장을 청중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 윽박지르지 않는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상황 속에서 나오는 여유로 보인다. 모든 사람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세상은 돌아갔다. 교회를 떠나서는 어떤 생활도 할 수 없던 때 였다. 그래서 토마스는 이런 강요하지 않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마주한 청중들은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교회의 명령대로 모든 것들을 해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설명과 적용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은혜롭고 풍성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 신앙을 접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신앙을 전제로한 그의 설교가 와닿을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성경조차도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진리로 받아드릴 수도 있고 받아드리지 않을 수도 있는 고대 문헌으로 폄하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는 토마스가 주장하는 바 또한 주관적인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신앙과 성경으로 시작되는 그의 강해는 현대인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한계가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앙이 행복이고, 계시의 말씀은 기쁨이었다. 학문적인 진리가 아니라 믿는 것이 행복하였고, 성경을 말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이런 행복을 얻는 방법, 기쁨을 얻는 방법으로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은 현대인에게도 그의 강해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면이라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추구했다. 인간이 발명해낸 과학적 지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온전한 말씀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그 자체이신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명확히 아는 것이 그 진리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 진리가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가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풍요와 안전을 누린다는 말과는 같지 않다. 우리는 진리는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진리가 우리를 이용하고 사용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대로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할 때에 행복과 기쁨이 우리 삶에 넘친다. 우리를 이용하고 다스리시는 진리가 우리를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진리 속에 살아간다.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우리도 기도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세세토록 찬송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영원한 삶으로 끝까지 인도하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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