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3일 일요일

종말은 선물이다! 안토니 후크마『개혁주의 종말론』을 읽고


I. 서론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다. 끝이 없는 처음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처음이 있고 시작이 있다. 인간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이 있다. 엄마 뱃속에서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만날 때 한 인간의 생명은 시작한다. 만나기 전에는 각자의 존재의 한 부속물에 불과하였지만 서로 다른 둘이 만날 때부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생명이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늙고 죽게 되면 새로웠던 생명은 끝을 맺고 만다. 그 생명은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영양분들은 땅속으로 흡수되고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힘을 준다.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창조가 있었다면, 종말도 있다. 신학은 하나님을 말하는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유하신 활동인 창조를 말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창조의 끝인 종말을 말한다. 종말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그 계시의 말씀을 해석하는 교회는 다양한 해석과 종말의 과정을 내놓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한 말씀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말씀에 한 가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것이 신학하는 자들 온 성도들의 임무이고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분석하고 분별하고 지식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혁주의 종말론』은 그러한 과정들을 잘 풀어쓴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어떤 것인가? 교회의 해석 중에서 어떤 점은 피하고 어떤 점은 취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 보여주는 책이다.

II. 본론

  종말에 대한 기대는 창세기부터 시작된다. 창세기에는 세계의 창조도 기록되어 있지만, 종말에 대한 어렴풋한 그림자가 같이 있다. 창세기에서 종말은 죄를 지어 저주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위하여,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하여 오실 구속자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고 저주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끝내기 위한 종말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대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종말의 양태나 종류가 다양해져 간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한 대상을 묘사하는 수단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 수단은 장차 오실 구속자, 하나님의 왕국, 새 언약, 이스라엘의 회복, 성령의 부어짐, 여호와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회복되어 창조 때 있었던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길 지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느 한 날, 어느 때에 한꺼번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이 뒤섞여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절대적으로 믿었고 그 통치가 마침내 눈에 보이도록 이루어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더욱 강화된다.

  신약에서 종말론은 구약에서의 종말론보다 구체화 되고 세분된다.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하여 종말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초림 이후로 종말은 한 날, 한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와 책임들이 강조되고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될 복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복은 장차 올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복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을 가르친다. 성도들은 현생의 복락만 쫓지 말고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복락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주곡,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런 신앙과 생활을 교회 내에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 지정한 종말을 바라보는 삶은 현생과 이생의 복을 모두 누리는 삶이다. 소망과 소유는 결코 하나만 있을 수 없다. 소망을 소유해야 하며, 소유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성경 말씀이 이러하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역사는 멈추지도 않고 도도히 자기의 리듬을 가지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흐르고 있다. 성경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신약 시대이다. 신약 시대는 재림을 기다리는 시대이며, 그 재림은 가깝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역사 또는 시간의 흐름 또한 끝이 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이 우리 앞에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모든 산물, 문화와 과학 기술 등과 같은 모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 속에서 함께 영원히 존재하고 발전하고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재림 이후에도 계속된다. 성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유발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보시고 기뻐할 수도 있고 기뻐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계신다. 거기다가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질적인 차이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기뻐할 만한 것들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때만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영원에 이르는 그 시간까지 우리가 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적인 문화라 이름 붙이며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역사의 흐름이 재림으로 인하여 끊어지지 않듯이 우리의 노력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신자의 노력이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데 있어서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헌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헌신과 노력이 우리의 책임으로 남지 않고 하나님의 책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부분을 책임져 주시지만 모든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부분이 있고,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다. 총체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음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헌신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가치가 있다. 우리 인간의 구원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구속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하셨던 에덴동산, 죄로 오염되지 않았던 처음 창조의 세계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종말에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삶 전체와 우리의 현실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세우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성령께서 함께 계심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그 장면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 위에 임하심으로 장차 성도의 상태를 직접 보여주셨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같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임하게 되신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 함께 하심, 위에 계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모든 복을 함께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팔복과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이 세상 도덕이 아니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 윤리적 수준을 우리의 본성과 같이 행할 수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하여 고난받고 죽임까지 당하는 그런 초월적인 고난을 우리 또한 견딜 수 있게 하신다. 또한, 죽음 가운데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승리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그 부활 사건을 우리 또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믿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겨우 첫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무화과의 첫 열매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맛없는 열매라고 한다. 대체로 먹기 위한 것이나 상품으로 팔기 위한 것은 두 번째 열리는 열매부터이다. 우리는 지금 첫 열매의 맛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질 진짜 열매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주어질 열매이다. 우리는 그 열매를 소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망의 이유는 우리가 첫 열매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첫 열매를 소유하고 진짜 열매를 소망하는 것은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 하나님의 오심을 통해 변화된 우리의 삶을 볼 때, 우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장차 우리가 맞게 될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다. 이것이 긴장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긴장이라는 말이 우리의 소유와 소망이 상반되고 대립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아 별로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이다. 우리는 그저 소유하고 있고 소망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더욱 완성되는 것이다. 긴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긴장이 있다면 소망하는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에 대한 긴장이 있을 뿐이다. 이 긴장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하나님 완성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데 우리의 모든 삶과 역량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알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역과 승리에 하나님 나라의 성패를 맡기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역에 기대어 이루신다. 우리의 사역과 승리는 우리를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승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우리의 감사와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일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종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의 종말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때문에 죽음을 주셨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구속이 필요하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귀를 통하여 이루셨다. 우리의 죽음은 이제 죄에 대한 죽음일 뿐이며, 부활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신자의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관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비록 죽음의 과정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표현을 너무 영적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바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어떠한 죄의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조차 이용하셔서 자신을 아름답게 섬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우리의 주인 되었던 죽음을 우리의 친구로 바꾸었다. 이 좋은 친구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게 하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종말로 향하여 한 발자국씩 나아가게 된다.

  육체의 죽음을 이야기했으면, 우리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플라톤 철학의 주장처럼 영원불멸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성경에서는 영원불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 자체가 죽음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는 것이라 말씀한다. 성경의 관심은 영혼의 영원한 존재 여부가 아니라 영혼의 복지 문제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영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삶의 자세이다. 성경에서는 영혼의 처우보다는 육체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육체의 부활이 영혼의 불멸성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이는 성경의 인간관을 보여주는데 플라톤의 이원론적 구분보다 성경은 인간을 양육 합일 체로 본다.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을 함께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을 좋다고 말씀하셨다. 선한 창조이다. 영혼은 육체가 부활하기 때문에 불멸할 수 있다. 육체가 부활하면서 부활체라는 불멸성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듯이 영혼 또한 부활체의 변화를 따라 변하게 된다.

  부활하기 전의 우리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달리 뾰족한 교리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지 않으시고 온 땅의 구속, 모든 피조세계의 구속 안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주의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고민하기보다는 삼위 하나님께서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데 우리의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랑에 의지할 뿐 우리의 상태와 우리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일한 위로 안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된다.

III. 결론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을 통해서 대략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종말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종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은혜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함으로 순종한다. 그 순종의 정도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보화가 든 밭을 사는 사람과 같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뜻은 우리의 죽음에 죽음을 위해서 주셨다. 죽음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하여 그 의미를 퇴색하였다.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기 위한 통로가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곁에 더 가까이 있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곁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성령 하나님의 임재,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까지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미 성령 하나님을 통해 소유하고 있으므로 완전히 그 완전함을 소유하게 되는 종말의 때를 소망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뜻과 무관한 종말이 아니다. 우리의 왜곡된 뜻과 생각과 의지를 교정하고 하나님께 정말로 헌신할 수 있고 그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신다. 종말은 완전한 완성을 뜻하며 완벽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고 처음의 창조가 온전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 창조는 인간의 범죄를 통해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종말은 그 이루지 못한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최종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소유했고 아직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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