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인간은 악이라는 질병에 걸린 환자인가? 하는 질문은 어찌보면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 인간은 악이라는 질병에 걸린 환자이기 대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고 결론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과 죄는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악이 죄를 유발하는 인간의 습성이자 사탄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인간의 행동과 생각, 말 등이다. 죄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은 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악이 없더라도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선택한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고 져야만 한다. 자신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만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죄를 짓는 인간에게 자신에게 책임을 찾지 말라 말하게 한다. 책임을 회피하게 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그 책임을 지라고 한다. 악은 죄와 구분되는 의지의 문제이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할 건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잘못이 없다 주장하게 만드는 이상 상태 즉, 병에 걸린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 ‘거짓의 사람들’ 은 질병으로서의 악을 규명하고 악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2. 요 약
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남자
저자는 조지라는 강박증에 걸린 남성에 대해서 소개한다. 조지는 자신의 머리 속에 침투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생각이 들었던 곳으로 다시 방문해야만 안심하는 중증의 강박증 환자였다. 조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의 아버지로 세일즈맨으로 큰 성공을 누리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깔끔함을 지키고자 자신에게 강박증이라는 연막을 뿌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강박증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고통스러움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방어기제로서 조지 자신에게 작용하였다. 조지는 그런 고통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이 때까지 연기해온 깔끔함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강박 증세에 사로잡혀 강박증적인 행동을 할 때에 악마가 자신의 생각 그대로 행해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 계약에 자신의 막내 아들도 끌어들여 아들 또한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악마와 계약했다는 사실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강박증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더 기뻐하였다.
저자는 조지의 생각에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조지의 선택이 단순히 강박증으로 인한 마술적 사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덕적 문제 즉, 선과 악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지에게 강력하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으로 겁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권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겁쟁이라는 소리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에 대해서 민감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조지는 단순히 강박증 환자가 아니라 악의 지배에 자신을 맡긴 사람이었다.
나. 악의 심리학을 찾아서
저자는 바비라는 소년과 그의 부모를 소개한다. 바비는 총으로 자살한 형을 둔 사춘기 소년이었다. 평소 형을 좋아하던 바비는 형의 자살 이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다가 크리스마스 때 이르러 형이 자살하는데 사용한 그 총을 선물 받고 더더욱 우울증의 늪으로 빠졌다. 사실 바비의 우울증은 부모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바비는 형의 죽음에 대해서 일정 부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한 부모는 바비를 그대로 방치하였고 그 무심함은 형이 자살하는데 사용한 바로 그 총을 바비에게 선물로 주는 것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바비 부모의 잘못은 맞벌이 부부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은 배우지 못해 아들들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큰 아들의 죽음과 작은 아들의 우울증을 그저 바쁘고 부족한 부모의 진심을 몰라주는 아들들의 불효 정도로 생각한 점이다. 저자는 여기서 악의 특징을 발견하는데 악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죄를 선택한 자신의 의지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함으로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없고 자신을 거스를 이유가 없다. 이는 악성 나르시시즘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악성 나르시시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악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결정을 따라 죄의 길로만 걷게 된다.
다. 일상 생활 속에 숨어 있는 악
저자는 로저와 그 부모에 대해서 소개한다. 로저는 상류층 가정의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다. 로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환자였다. 저자는 정부의 행정직으로 일하던 때라 로저에게 충분한 도움을 제공할 수 없어 부모님에게 로저를 담당할 심리 상담사를 추천해주고 로저가 기숙사 학교로 갈 수 있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로저의 부모님은 저자의 제안을 거부하고 로저를 기숙사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로저는 그 학교에서 잘 적응하여 사랑받고 또한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우울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학교 관계자의 집을 도둑질하는 범죄를 하게 된다. 로저의 부모님은 다시 저자를 찾아왔다. 저자는 로저가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학교를 옮기지 말고 자신이 소개한 상담사에게 아이를 맡기라 조언한다. 그러나 로저의 부모는 로저를 도저히 구제불능, 불치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이로 매도시키고 저자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자신들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로저를 구제불능 불치의 정신병을 앓는 사춘기 소년으로 변화시켰다.
저자는 또한 하틀리와 사라의 사례를 소개하며 지배욕이 충만한 아내와 수동적이고 게으른 남편의 만남을 소개한다. 아내는 남편을 얽매여서 그를 자신의 노예와 같이 부린다. 남편은 그것에 개의치 않지만 스스로 상처입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부와 로저의 부모의 경우를 보면서 악의 정체를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희생양을 찾아 자신의 악한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 병적인 습성이다. 저자는 이런 병적 습성을 병의 일종이라 정의한다. 악에는 고통과 장애가 뒤따르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지만 간암이라든지 심장 협심증이라든지 고통과 장애가 따르지 않는 병은 많다. 그리고 병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원인으로 걸리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병에는 일정 부분 자신의 책임이 존재한다. 또 악이라는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불치병이 많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히는 이유는 치료책을 찾기 위해서이다. 악이라는 병명이 붙혀졌다면 우리는 악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그 치료책을 찾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악의 병명을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한 특수한 변이와 이동성 정신분열증으로 제안한다. 뒤에 이어지는 안젤라와 빌리의 사례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라. 악의 실체에 대한 접근
저자는 자신이 겪어본 환자 중에서 가장 유별났던 찰린이라는 환자를 소개한다. 찰린의 문제는 심각한 강박적 증상과 자폐성을 보였다. 끊임없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고 자기만의 규칙으로 살아간다. 저자는 정신 건강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현실에 끊임없이 헌신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는데 찰린은 어느 것 하나도 건강한 모습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보다 더 위의 있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종속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녀 안에는 치료받고 싶다는 감정이 존재했고 그것이 그녀가 구제불능일 정도로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알맞은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 치료는 구마와 축사이다.
마. 귀신들림의 진단과 치료
저자는 축사의 과정을 두 차례 견학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귀신 들림이라는 현상은 매우 희귀한 현상이고 그것을 분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귀신 들림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자기의 영혼을 귀신에게 파는 과정에서 귀신 들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환자가 정신 질환만 걸린 것인지 정신 질환에 걸리고도 귀신에 들린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 속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고착과 해리 그리고 외로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 들린 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탄은 파괴성을 말한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품으시고 참으신다. 또한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 악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듯 악 또한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힘을 잃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거짓말로 사람을 조종하고 거짓말로 자신을 지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우리를 위해여 주셨다. 따라서, 축사의 궁극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바. 영혼을 잃어버린 집단의 악
저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쾅가이 지역의 밀라이라는 마을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사건을 소개한다. 이 사건을 기초로 하여 집단의 악을 찾아간다. 집단이 가지는 악은 전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각 분야의 전문화된 자들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에 집단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죄책감을 서로에게 떠밀어 결국 아무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인간은 지도자이기 보다는 추종자가 되기 원하고 수동적이길 선호한다. 지도자나 집단의 결정에 그리 반감을 가지지 않고 집단 정신이라는 이름 아래 집단에 대항한 적을 만들고 그들을 해하는 것이 집단과 또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집단에서도 나르시시즘이 악의 구체적인 동인이 되며 유지하는 힘이 된다. 저자는 이런 집단적인 악을 대항할 방법은 개개인의 도덕적인 결정과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사. 악의 심리학 그 위혐과 희망
저자는 악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주장하면서 과학적 연구가 가져온 위험에 대해서 언급한다. 악이라는 것은 결국 도덕적 판단이다. 그것을 과학화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덕적 판단을 어떤 객관적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사실 어렵다.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실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결론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판단에는 그 때 그 때의 사실이 아니라 진리가 더 객관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런 기준은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절대화되고 잘못 오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악의 연구 방법으로 사랑의 방법을 제안한다. 하나님께서 악을 사랑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사랑으로 악을 대해야 한다
3. 악과 치료에 대한 자신의 이해
우리는 죄와 악을 혼동하여 말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죄와 악을 붙혀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죽었던 우리, 죄악에서 건져내신 등 우리는 관용적으로 죄와 악을 붙혀서 사용한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악한 것이고 악한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죄와 악에 대해서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죄는 우리 말과 행동과 생각의 결과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악은 죄를 일으키는 근원이자 죄를 계속 짓도록 하는 근거 없는 속삭임이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악이 없을 수 있으나 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있다. 죄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3장에서 나타난 최초의 범죄 현장에서 우리는 죄와 악의 정체를 잘 알 수 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다가가 것은 분명 아담과 여자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곁을 지나고 있었을지 그 나무의 실과를 먹고자 하였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곁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곁에 있던 뱀이 아담과 여자를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맨 처음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선택하도록 유도하였고 죄를 택하도록 권하였다. 그 때 인간은 죄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 선택은 어려웠다. 악의 유혹은 그만큼 강력하였고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아담과 여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창세기 3장의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뱀은 악을 말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행위가 바로 죄를 말한다. 뱀은 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중에서 선택이 자유로웠던 아담과 여자의 의지에 죄를 선택하고자 하는 동기를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죄를 통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집어 넣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인간은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그 결과 아담과 여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악은 인간의 밖에 있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된 이 후의 상황은 인간 속에서 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서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었다.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숨기기 위하여 급하게 나무잎으로 엮은 옷을 입게 된다. 그 옷은 각자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실상은 서로를 향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다. 아담과 여자는 처음 지어질 때부터 벗은 몸으로 생활 하였다. 그들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고 그들을 해하는 것도 없었으며 그들을 부끄러워 하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악이 자신들 속에 들어오고 죄를 지은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하였다. 정신 건강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현실에 끊임없이 헌신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자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창설하신 에덴 동산에서 벗은 몸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야할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앞에 주어진 에덴 동산이라는 현실 앞에서 헌신하지 못하고 현실이 원하는 모습으로 머무르지 못했다. 나뭇잎으로 옷을 엮어 입음으로 현실에 헌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부끄러움이라는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부끄러움의 감정은 다음 장면에서 평범한 부끄러움이 아닌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며 아담과 여자를 찾으실 때에 그들은 숨어있었다. 왜냐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속속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부끄럽다며 숨어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어디에 있을 것이다 라는 사실도 아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 때문에 숨어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병든 상태를 보전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놔두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속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거니시며 그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도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하여 하신 행동이다. 그 사실을 알았던 아담과 여자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였다. 이제 아담과 여자의 행동의 깊숙한 곳에 머물던 악이 그들의 말을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 그리고 뱀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에게 그들의 부끄러움의 원인을 물으신다. 아담은 여자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자신에게 주어 그것을 먹으므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자는 또한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고백한다. 그들에게 아직 악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 그들은 그들의 죄에 책임자가 따로 있으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죄지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나를 범죄하게 한 저 사람 또는 저것을 벌해 달라 말한다. 아담과 여자에게는 죄책감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의 말에는 또한 극단적인 수동성인 나태함이 드러난다. 그들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된 이유는 나의 옆 사람이 그 뱀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유혹하였기 때문에 먹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들은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받아 누리는 첫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 양간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이 들어선 아담과 여자에게는 극단적인 수동성이 자리잡아 그들의 죄책감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도록 그들의 이성적 판단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종교적 의식을 마비시켰다. 그들이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사실 아담과 여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죽음을 돌리고 있다. 서로에게 죽음을 주고 서로에게 죽음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악의 속성은 파괴성이다. 악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파괴하고자 한다. 아담은 여자를 주범으로 지목하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을 파괴시켰고 또한 여자의 죽음을 요구하며 살인을 저질렀다. 여자 또한 뱀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워 방금 전까지 가졌던 뱀과의 신뢰 관계를 깨어버리고 뱀에게도 합당한 죽음을 내려달라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유지하시는 분인 하나님께 당신의 창조물들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뱀도 지으셨고 아담도 지으셨고 여자도 지으셨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하시고 뺏을 수도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것을 행하시지 피조물의 뜻을 따라 행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듯한 악의 향연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치료하셨을까? 하나님은 여자의 말에 주목하였다. 여자는 뱀의 미혹이 자기 행동의 원인이었지만 그것을 결정한 것은 자신이라는 말을 분명히 하였다. 여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고백한 여자를 인정하고 그가 지적한 악에 대해서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고 벌을 내리신다. 뱀에게 변론할 기회는 없었다. 뱀은 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시는 방식은 죽음이 아니였다. 악은 폭력을 행사하며 공포를 조장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불편함을 주셨다. 그가 감당해야할 것은 일생동안 배로 다니며 흙을 먹고 살아야 할 것 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밖에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뱀의 형벌은 불편함으로 끝이났고 하나님과 직접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죽음의 언약을 맺었던 아담과 여자에게도 불편함 정도의 벌이 내려졌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벌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심과 사랑으로 첫 범죄의 재판을 끝마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또한 신실하셨다. 아담과 여자에게 죽음을 선고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그의 사랑하심은 그들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나중으로 미루셨다. 그 사이에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남기셨다. 우리가 흔히 원시 복음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악에 대한 최종 판결을 유보하셨다. 유보된 판결 기간 동안 여자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아들이 악에 대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다. 그 약속 또한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믿도록 자신의 행동을 먼저 보이셨다. 그 신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이 지독한 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담이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준 때이다. 그들을 죽음을 선고 받았으며 더 이상 에덴 동산에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담은 잠시 전까지만 해도 죄책감을 떠밀고 죽음을 떠밀었던 여자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준다.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죽음을 선고 받았으며 더 이상 생명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에덴 동산에서 살지 못한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돌보지 않고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시들어버리는 죽음의 땅이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도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그의 전능하신 권능을 믿었기 때문에 하와라는 이름을 줄 수 있었고 또한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하와라고 불릴 수 있었고 부를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악에서 완전히 벗어나길 원했고 악과 싸웠으며 악을 어느 정도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치료하시고 돌보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4. 결 론
우리가 악하여 죄 밖에 행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품으시며 사랑으로 보살펴주시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신다. 악은 분명히 병이다. 그리고 그 치료책은 사랑이다. 그 연구 방법 또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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