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일 금요일

[경남U] 경건 생활

I. 서론 : SFC의 경건한 시작!

    SFC는 모닥불 기도회로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SFC와 같은 개혁주의 신앙운동이 기도회라는 아주 경건한 형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오순절 교회나, 순복음 교회, 성령님과 은사를 강조하는 다른 교단이나 선교단체에 비해서 개혁주의는 영적인 부분이 약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SFC는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조국 교회에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먼저 무릎 꿇었다. 지금도 모닥불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각 학교와 교회에서 이어져가고 있다. 우리 선배들이 SFC를 경건하게 시작했듯이 지금을 사는 우리 또한 경건하게 SFC 한다.

    경건하게 시작한 SFC는 경건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의 위대한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배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열심히 배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듯하다. SFC에서 하는 모든 공부가 경건을 위한 공부라고 하지만 공부하는 나 자신만 생각해봐도 그렇게 썩 거룩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전공 지식보다 더 많이 쌓이는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 속에서 ‘나 신학교에 가야 하나?’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은 자가 여기 적지 않을 것이다.

    경건하게 시작한 SFC, 머리만 커지는 것 같은 나 사이에서 오늘 경건 생활 강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강의는 매우 지적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경건을 위한 강의인 것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대한 강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인 경건 생활에 대해서도 다루는 강의가 될 것이다. 생소한 개념과 단어가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붙잡고 이 강의에 임한다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우리가 고백하듯이 우리 스스로는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II. 본론

1. 경건과 영성

    경건(pietas)과 영성(spiritalitas)은 기독교가 형성되던 초기부터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가진 믿음으로 변화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영성(spiritalitas)을 거부하고 경건(pietas)을 선택하였다. 영성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건과 영성은 그 정의가 비슷하나 각각의 단어에서 강조점이 다르다. 영성의 경우에는 주관적인 경험, 체험이 강조되고 경건의 경우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성경이나 교리에 강조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구원을 경험하였다고 하자. 영성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구원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경험했는지에 관해서 관심을 가진다. 다시 말하자면, 영성의 측면에서 구원 경험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사람에게 일어난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반면에, 경건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덕과 그 공덕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해서 관심을 둔다. 특히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난 결과 즉, 구원의 열매에 대한 측면을 강조한다. 경건과 영성이 각각 강조하는 점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영 성
경 건
관 점
주관적
객관적
구원에 대한 강조점
구원받은 경험을 중시
구원의 열매를 중시
말할 때
내가 경험하기에...
성경이 말하길....


    경건과 영성의 이런 차이점 때문에 개혁자들은 영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경건을 추구하였다. 왜냐하면, 영성은 로마 가톨릭의 수덕신학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修德이라는 한자어와 같이 ‘덕을 닦는다’ 뜻으로 전형적인 공로주의 구원론을 표방했었다. 수덕신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도 구원을 얻기 위한 수많은 덕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객관적인 구원 역사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믿음에 따라서 그리고 덕을 쌓아가는 그 정도에 따라서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렇게 영성(spiritalitas)의 개념을 왜곡되게 받아들였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개혁자들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믿음으로 변화된 삶의 양식’을 뜻하는 말로 경건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개념이 전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찬양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기도할 때 기도한 제목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확신이 들거나, 묵상할 때 오늘 나에게 필요한 말씀이 내 눈앞에 주어지는 것은 없었던 일도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고 심지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단지 영성의 개념 안에 있는 주관성과 인간 중심성에 대하여 주의 깊이 살피고 어떤 것이 건전한 것인지 구분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2. 우리가 경건할 수 있는 이유 :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경건과 영성에 대한 의미 정리가 끝났다면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해결하지도 못하는 자들을 불러 경건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였는가? 실패하였는가?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 역사서인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인 13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거룩하지 못했고 이방 여인과 우상 숭배를 일삼았다. 비록 느헤미야가 그 일들을 수습하였지만 거룩하라고 명령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 쉽게 그 명령을 저버리고 자기가 옳게 여기는 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다. 그들은 실패하였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진정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명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여 얻으신 복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 사랑이 우리에게 확증되었다는 사실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복락, 죽음에서의 구원 즉, 부활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연합이라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신적 존재와 합일되거나 몰입되는 등,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 간의 영적이고 실제적인 신비한 연합이다. 이 연합을 통해서 성도와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는 하나로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온갖 부요함을 성도는 다 누리며 칭의와 성화의 삶 즉,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가운데 있는 성도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방편을 통하여 자신이 신비한 연합 가운데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연합 자체를 누리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은혜의 방편’이다. 이 은혜의 방편은 총 세 가지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54문). 오늘 우리는 은혜의 방편 중에서 기도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은혜의 방편 세 가지는 모두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지만, 다른 두 가지는 몰라도 기도는 예배 현장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라도 준비물 없이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삼상 12:23; 엡 6:18; 살전 5:17). 기도는 은혜의 방편 중에서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3. 기도 : 경건의 시작과 종점

    기도는 다른 은혜의 방편들과는 종류가 다르다. 다른 은혜의 방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중심이다. 은혜의 방편 중 첫 번째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도 포함된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55문). 마찬가지로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따라 제정되었다(고전 11:23~26). 반면에 기도는 우리의 말, 즉 인간의 말이 중심이 된다. 다른 은혜의 방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할 때, 기도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 앞에 올라간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해서 이 기도는 온전히 우리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받은 그 약속을 의지하고 하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지지 않는다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신앙과 경건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첫 번째 현상이다. 한 성도가 기도한다는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이 믿어진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도는 경건 생활의 완성이다.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사역을 내려놓으면서도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삼상 12:23), 사도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갖출 것을 명령한 다음, 마지막으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명령한다(엡 6:18). 기도의 방법이 모든 경건 생활의 기초이고 모델이고 완성입니다.

    기도가 어떻게 모든 경건 생활의 기초이고 모델이며 완성이 되는가? 기도의 구조 즉, 기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되시고 기도를 받으신다(마 6:9).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있도록 중보 즉 보증하신다(딤전 2:5).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신다(롬 8:26).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우리 생각으로만 지어낸 말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작은 기도도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 드려진다. 우리가 기도하도록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한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들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기도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행동, 일상을 기도로 드릴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성자 하나님의 중보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생각나게 하심)을 받아 일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운전할 수 있고, 카톡할 수도 있다. 물론 일상을 기도로 드리기 위해서는 기도 자체를 기도의 구조 안에서 능숙하게 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늘 기억하며, 기도의 구조 속에 있는 나를 인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를 위한 훈련으로 칼빈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기도의 지침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은 기독교 강요 3권 20장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였다. 칼빈 선생님은 성경을 통해 기도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을 내려주신다. 먼저 기도의 내용에 대한 지침이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먼저 인식하고 기도하는 것, 기도할 때에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필요를 절감하며 통회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라보고 자신의 죄성과 부패성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셋째,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더러운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신 것에 대한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회개가 필요하다. 넷째,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셔서 자기 앞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사랑과 필요를 간구해야 한다.

    칼빈 선생님은 이런 기도 내용적 요소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지침을 내려주신다. 첫째,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해야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선 자의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모자를 벗는 행위는 허용된다. 그러나 미신적인 관습은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미신이라고 하는 것은 믿지 않아도 될 것을 믿는 것을 의미). 셋째,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그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훈련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거나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미신적으로 정해진 시간과 장소를 절대시 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넷째, 인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신부의 말을 듣지 않는 신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인내하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4. QT 성경 묵상 : 성경으로 하는 기도

    성경 묵상을 살펴보기 전에 성경 묵상과 성경공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성경 묵상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성경공부의 전제는 성경을 글로 적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제1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제2 저자인 인간 저자를 사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고 제2 저자가 가진 모든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활용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공부의 목적은 성경 뒤에 있는 문학적 요소, 역사적 요소, 문화적 요소 등을 알고 성경에 적힌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현시대에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 묵상은 성경공부의 전제와는 다르게 성경을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묵상은 성경공부처럼 성경에 관련된 사실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사적, 문학적, 문화적 사실들에 바탕으로 성경 구절 그 자체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성경 구절을 전체 기독교적 주제와 연결하여 이 구절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모리아 산을 자기를 태워서 죽일 나무를 들고 올라가는 이삭을 보면서 골고다 산으로 자신을 매달아 죽일 나무를 들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놋뱀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한 성경 구절을 그 구절의 의미만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성경 구절을 전체 성경의 한 부분으로 보고 성경 전체에 나타난 기독교적 주제를 강화한다. 성경 묵상은 성경공부와는 다르게 성경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여 다른 곳으로 확대하기보다 성경을 성경 자체 메시지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성경 묵상은 전체 성경의 메시지를 강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게 만든다. 이 반응은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며,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 반응을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정보를 얻으려는 일반적인 독서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읽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성경이 항상 ‘은혜’나 ‘큰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열린 마음과 겸손한 귀기울임, 기꺼이 복종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때까지 성경공부와 묵상에 대한 차이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성경공부
성경 묵상
중 점
구절 자체의 의미 파악
메시지 파악
필요한 것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지식
직관력
결 과
현상황에 대한 적용
하나님께 열린 마음
겸손한 귀기울임
기꺼이 복종하는 마음
결과의 방향성
외부로 확장
내부를 강화


    우리는 성경공부와 성격 묵상을 골고루 균형 있게 하면서 그들이 주는 유익을 누려야 한다. 둘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 이미 교회사에 많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를 강조하는 극단으로 가게 되면 성경은 당시 독자였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고대문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거룩한 책이 아니라 도덕책에 불과하다. 성경 묵상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에 문자적 의미 외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여 성경의 본래 뜻을 왜곡하는 길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공부와 묵상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지침이 필요하다.

    날마다 주님과는 성경 묵상에 있어서 아주 좋은 지침을 제시해 준다. 바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묵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과 구성을 보면, 해설과 도움말은 성경공부를 위한 것이다. 반면에 질문과 기도 부분은 성경 묵상을 위한 것이다. 첫쩨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오늘 읽은 묵상 본문이 삼위 하나님의 어떤 면을 말씀하고 계신지 찾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이미 많은 신앙 선배들이 오늘 본문과 유사하다고 지적한 본문에서 삼위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말씀하고 있는지 찾는 활동이다. 셋째 단계는 교회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고 있는지 발견해보는 활동이다. 이런 묵상 활동들을 통해서 성경 구절의 의미를 찾기보다 오늘 읽은 구절이 말하는 하나님, 성경,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원리를 강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 일상 속에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겸손히 귀기울이며, 기꺼이 순종하게 한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해서는 암송을 하는 것이 좋다. 날마다 주님과의 구성을 살펴보면 본문이 기록된 면에 굵게 표시된 한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오늘 묵상한 본문에 주제문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를 오늘 하루 암송하면서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하면 더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작은 소리로 암송한 말씀을 되뇌이면서 이 말씀에 나타나신 하나님, 다른 성경을 통해 다른 측면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교회를 통해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묵상한다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라고 고백한 시인의 고백을 정말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5. 쉬지 않는 기도 : 매일의 생활 속에서 기도.

    기도의 구조가 일상 속에서 적용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기도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유지할 수 없다. 훈련을 통해서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행동이나 생각을 반복함으로 형성될 수 있다. 옛날 수도사들은 일하면서 기도하기를 훈련하였다. 그들은 일 할 수 있도록 명철함과 건강함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성공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일의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런 기도들은 회상하는 심령을 갖게 만든다. 내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때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한다. 이런 것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세 가지 방법을 통해 훈련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 셋째는 은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훈련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끊임없이 회상하는 것이다. 이를 잘 연습한 사람은 로렌스 수사이다. 그는 일하는 동안 규칙적인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생각을 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렀다. 그리하여 기도가 자연스럽게 대화하듯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짧은 기도문을 외워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였다. 이 기도문은 짧지만, 복음의 핵심이 다 녹아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되게 해달라는 죄인의 간구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틀에 박힌 훈련을 통하여 일상 속에서 기도하는 것을 훈련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어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 몰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연구하고 묵상하고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특정 상황에 대하여 몇 장 몇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계시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환경과 사건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종을 배워야 한다. 더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시고 모든 환경과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권위 있는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은혜에 대해 충성하는 것은 실제적인 은혜 사역에 대한 겸손한 반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 다른 외부적 자극을 통해 주시는 은혜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그렇기에 은혜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겸손함으로 기꺼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그의 실수는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그러나 주관주의로 빠지거나 자기 기만에 대한 두려움은 실재하기 때문에 은혜에 대해서 성경을 비추어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성경에 명시적인 뜻이 무엇인지 먼저 살피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뜻에 맞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럴 때, 은혜에 대한 충성은 완전해지고 모든 일을 성부 하나님을 위하여 성자 예수님의 중보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생각나게 하심)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훈련을 더욱 강화시키는 훈련이 있다. 바로 자기 점검이다. 쉬운 말로 하면 일기 쓰기이다. 매일 했던 훈련들을 기록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난 은혜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체계적으로 자기 점검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영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얼마만큼이나 왔는지를 일기를 쓰다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삶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셨는지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손 아래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칼빈 선생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하였다. 칼빈 선생님의 말을 반대로 해도 성립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와 뜻을 통해 그것을 기록하고 회상하고 되짚으면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될 것이다.



III. 결론 : 경건한 우리, 경건한 SFC

    이 강의를 통해 개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경건 훈련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예비알돌인 여러분은 공동체 경건보다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준비하는 것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바쁨과 분주함 속에서 이런 훈련을 이어나가기에는 정말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풍성함과 부요함을 누리기 위하여 경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건은 성도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의 조건이며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된다. 물론 경건의 방법이 유일한 통로가 되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누리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기도하자! 묵상하자! 자기를 돌아보고 끊임없이 삼위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것을 함께할 사람을 구하자! 경건한 우리가 되도록 하자! 비록 오늘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갈 경건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개인적인 경건 훈련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함으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될 것이다. 함께하자! 그리고 모르면 가르쳐 주자! 경건에 이르도록 모두 힘쓰자!



IV. 참고 도서

1. 사이몬 찬. 『영성 신학』. IVP. 2014

2.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IVP. 2011.

3. 그래엄 골즈워디.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2015.

4. 숀 마이클 루카스.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흥과 개혁사. 2014



<심화학습>

1. 제럴드 싯처. 『영성의 깊은 샘』. IVP. 2018.

2. 마이클 헤이킨. 『깊은 영성 : 성경적 영성으로의 초대』. CLC. 2017.

3. 아서 홀더 편집. 『기독교 영성 연구』. CLC. 2017

4. 유진 피터슨. 『현실, 하나님의 세계』. IVP.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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