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5일 화요일

지평의 융합! 세계의 충돌(베드로전서 1장 1절~2절)


베드로전서 1장 1절~2절

1절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절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제목 : 지평의 융합! 세계의 충돌! : 텍스트와 독자, 독자와 독자.


성경은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읽는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 혹은 특정한 상황에 빠져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록된 성경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경 중에는 그렇지 않은 성경들도 존재한다. 구약의 경우에는 시편과 잠언 같은 시가서와 지혜서들이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기록되었다. 시가서와 지혜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특정한 순간을 계기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신약 성경에는 공동 서신이라고 불리는 성경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기록되었다. 물론 그 당시 교회가 맞닥드리고 있던 로마 제국의 핍박과 영지주의 이단의 위협, 유대주의자들,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을 향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성경이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 수신자가 불분명하고 특정 수신 공동체를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공동 서신의 특징이다.

오늘 읽은 본문 또한 공동서신의 일부분이다. 사도 베드로는 5개 지역에 편지를 보낸다고 말한다. 이 다섯 지역은 모두 터키 땅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이다. 터키는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지역간의 무역이나 교류가 적었다. 각자 나름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살아갔다. 그것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통일이 된 이후에도 각자의 행정구역으로 남아 각자의 특성과 전통을 가지고 살아갔다.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공동체는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 전통을 가진 각각의 다른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하나의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공통된 교훈을 얻게 된다. 각기 다른 환경에 쳐한 교회 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공통의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성경이 기록된 시기와 성경 제 2 저자들의 인간적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기적으로 영감을 주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사실을 통해 성경이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고려해보아야 할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우리의 성경 묵상 시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성경 묵상 가운데 우리는 성경을 필연적으로 해석하게 되어있다. 종교개혁 시대 부터 성경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 방법이 주된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문법적 정보, 역사적 정보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옛날에는 찾지 못했던 유물이나 고문서 하나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전제들이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석에 대해서 절대적인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9세기는 계몽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성에 의해서 찢어발겨졌다. 탈신화화, 역사적 예수 등,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를 한낱 도덕종교로 격하시켰다. 슐라에르마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고전 해석학, 법 해석학, 성경 해석학 각각의 영역으로 나뉜 해석학을 탈영역화 시켜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을 제시하였고 ‘저자의 의도’라는 과학적 방법으로 찾을 수 있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고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성경의 떨어진 권위를 세우길 시도하였다.

슐라에르마허의 노력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그가 주장한 객관주의와 표현주의(심리주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저자의 의도가 과연 과학적 방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인가의 대한 의문은 의미를 창조해내는 절대적 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텍스트를 읽는 목적 자체는 저자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진리와 의미를 찾는 것임을 지적 당했다.

오늘은 가다머라는 해석학자가 제시하는 해석학에 대해서 배워볼 것이다. 낭만주의 해석학, 슐라에르마흐의 해석학은 해석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해석이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과 규정이다. 해석학은 해석 방법과 규정의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낭만주의 해석학은 규범적인 학문이다. 해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해석학은 기술적이다. 우리가 원하고 행할 때에(해석할 때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해석학이라고 이해하였다. 작품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기술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가다머는 우리가 해석을 할 때에 필연적으로 전통(역사)에 귀속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통이 우리가 해석할 때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실체라고 보았다. 우리는 전통에 내던져저 있고, 몰입되어 있으며,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을 통해서 해석이 가능하다. 가능한 경험 조건 내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전통은 하나의 전통만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성향, 종교, 성별, 경제적 위치 등등 자기를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 전체가 전통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전통의 결과는 선입견으로 나타난다.

선입견은 반투명하다. 우리 스스로는 선입견을 판단할 수 없다. 반성이 불가하다. 따라서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주장하듯이 총체적으로 거리룰 두고 관점을 전환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해석자는 전통에 몰입되어 있고 전통 안에서 형성되어 있다. 전통으로 인해 형성된 선입견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선입견 없이 텍스트를 대한다는 말조차도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전통 안에 우리는 내던져 졌고 몰입되어 있으며,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해석의 절대적인 권위를 전통에게 내주어서는 안 된다. 전통은 신이 아니다. 의미를 무에서 창조해낼 수 없다. 절대적 저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에서 의미를 창조할 수 없듯, 절대적인 전통 또한 존재하지 않아 무에서 의미를 창조해낼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이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통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전통을 떠나 어느 곳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우리 자신을 가정한다 할지라도 무한히 오류가 없을 수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전통을 강조하는 것, 귀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독자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저자 조차도 저자 자신의 전통에서 텍스트를 생산해 낸다. 그리고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동시대의 전통 속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또한 독자는 독자 자신의 전통에 따라 항상 저자의 이해와는 같지 않는 이해를 하게 된다.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듯이 독자 또한 텍스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한다. 독자는 텍스트를 통해 저자 본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는 진리,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독자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각 독자가 가진 전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일어나는 기적을 설명하는 일을 하고 의미가 공적으로 공유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한 것, 말하여진 무언가에 대한 이해한 것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 있어서 규칙성이나 객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상황이다. 각자의 전통 속에 내버려지고 몰입되고 형성되어 있는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해석될 본문의 내용 자체가 규칙으로 규정되고 독자들의 차이를 무관하게 만들 수 있는 규칙이 있다면 가능하다. 수학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해석은 해독이 아니다. 객관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된다. 저자의 의식은 독자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영향사 의식이기 때문이다.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저자의 의식이 불투명하여 저자 스스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저자가 의도를 가지고 사용한 단어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다른 전통을 가진 곳에서 다른 의미로 변하게 되기 때문에 저자와 작품은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와 작품이 분리될 수 있다면, 작품의 의미는 저자와 독자가 함께 규정하는 것이다. 독자 또한 텍스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 해석학에서 독자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절대적 저자는 죽었다. 저자와 독자 모두 해석자이다. 각자의 전통 위에서 동일한 텍스트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절대적인 해석을 찾는 과학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방법과 규범은 진리를 찾지 못하게 만든다. 방법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제한시킨다. 과학적 방법 너머의 진리를 찾고자 한다. 텍스트로부터 거리두기는 유용한 해석 방법이다. 텍스트에 몰입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텍스트를 관찰하는 것은 의미 파악에 있어서 유용한 방법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한적인 의미만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리두기라는 것도 전통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떤 해석 방법도 전통을 벗어날 수 없다.

해석의 방법을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예술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의미를 전달한다. 어떤 것에 대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제가 아니다. 세계를 전달한다. 작가의 전통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세계이다. 이 세계는 작품을 통해 일부만 볼 수 있지만,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전체를 떠올릴 수 있다.

작품은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해서 우리는 작품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속해 있다.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건냄으로 보편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말 건냄의 방식이 보편적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놀이와 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놀이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공연과 같은 것이다. 상이라는 것은 그림과 같이 비언어적인 것들이다. 놀이나 상은 어떤 것에 대한 무언가를 표현한다. 이 표현 속에는 본질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본질에 대한 인식이 우선될 때에 그 존재에 대한 고양된 진리, 정제된 진리를 도출하게 되고 그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현시하고 계시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 너머의 진리를 찾는다고 할 때에 그 존재에 대한 고양된 진리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보여주고 ,현시하고 계시하는 그것을 찾아 내는 것이 필요하다.

존재에 대한 고양된 진리를 찾는 방법에는 공연과 번역이 있다. 공연은 연극이나 연주회 같이 실제 공연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텍스트를 머리 속에서 공연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공연은 대본이나 악보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각각의 공연은 한 작품의 반복이다. 다양성이 일치는 대본과 악보 즉, 텍스트에서 발현된다. 그러나 다양성의 일치는 공연의 질과는 무관하다. 번역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리를 찾은 후에는 적용이 일어나야 한다. 이 적용은 작가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가 텍스트를 통하여 부딪칠 때에 일어난다. 각각의 세계가 차이점은 폐기되지 않고 매개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에 나타난다. 이해는 합의가 아니다. 화행을 통한 진리주장에 대한 충분한 파악이다. 이 텍스트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를 찾아내어야 한다. 적용은 철저히 실천에 관련이 있어야 하고 의미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세계와 세계가 부딪칠 때에 지평들의 융합이 일어난다. 텍스트와 독자의 대화가 일어난다. 대화는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상처받을 가능성을 인식하고 무지를 아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묻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우리가 찾아야할 행위이다. 답을 찾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야 한다. 대화는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끄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공통의 교감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텍스트와의 대화 뿐만 아니라 해석자들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의 목적은 이해이다.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 내 뜻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가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텍스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 기록된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행하실 것이다. 교회는 텍스트인 성경을 해석하며 살아가는 해석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명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성경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다양한 지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모두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같은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연주가 각 무대마다 다르듯, 번역이 각 나라의 언어마다 다르게 표현되어지듯, 대화가 사람에 따라 달라지듯, 하나님께서는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셨고 결국에는 그 해석들이 거룩한 삶을 이루도록,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