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새벽기도 (이사야 9장 1절-7절)

이사야 9장 1절-7절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말씀의 시간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곳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경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은혜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소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이전에 겪었던 고통의 무게를 잊을 만큼 크고 크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고통받던 자, 어려움 당하던 자, 포로로 잡힌 자, 노예로 부림 당하던 자가 자신의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 그리고 자신을 억누르던 폭력적인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구원 받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는 사실이 포함됩니다. 이전의 고통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쁨이 구원 받은 자에게 허락됩니다.

오늘 본문에 예언도 고통 가운데 구원하실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고통과 멸시를 어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어둠을 큰 빛이 나타나 몰아낼 것을 노래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에는 고통이 물러가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비췰 때에 우리 속에는 기쁨이 넘쳐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한 아기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한 아기,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구원, 그 은혜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절과 2절에서 구원 받는 대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전에 고통 받던 자들,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1절 말씀에 따르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에 살던 사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지어 섬겼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 제도가 아니라 인간 왕이 정한 제사 제도에 따라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라는 나라를 일으키셔서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포로 잡혀간 사람들은 고통 받던 자들,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라고 불릴 만큼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 하나님께 벌을 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벌하시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하니 조금 말이 안 맞는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것에 대해서 마음대로 행할 권리가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것인 토기를 만들다가 모양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깨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토기는 토기장이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주셔도, 구원을 베푸셔도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혹은 충동적으로 재앙을 주시거나 구원을 주시거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곁에 두기 위하여 재앙과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주시든지, 구원을 베푸시든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3절과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적절한 응답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기뻐하는 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을 기뻐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우리가 기쁨으로 응답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4절과 5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실제적인 증거들로 너희들에게 구원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을 짖누르는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압제자가 휘두르는 채찍과 막대기가 꺾어지며, 기드온과 삼 백 용사가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았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기적적인 승리를 눈 앞에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금방 구원의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형편과 상황이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이룬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사랑과 뜻이 곡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이 착각하지 못하도록 결정적인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정적인 증거를 통하여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정적인 증거가 6절과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님의 구원을 행할 한 왕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왕을 메시야,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이룬 구원이라 착각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메시야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어떤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인간이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굳게 세우며 무궁히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 약속하시는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베푸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도록 하셔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길 원하십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구원을 베푸셔서 자기 사랑을 알리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것입니다. 이 복과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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