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후서 1장 12절~21절 / 19.12.29)

베드로후서 1장 12절~21절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애매한 기억력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볼 때에 어떤 일들을 했는지 어떤 장소들을 방문했는지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를 기억하시나요? 정말 기억남는 것이 아니면 잘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면 정말 다를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기억력은 애매합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시험칠 때를 생각해봅시다.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이야 잘 기억나겠지만, 대충 넘겨 보았던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아서 힘들었던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겁니다.

기억을 의지한 나답과 아비후

성경에서도 인간의 애매한 기억력이 잘 나타난 사건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 땅 종 되었던 땅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우리로 치면 교회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금방 완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일할 사람들,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맡을 사람들을 임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고 제사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제사장으로 임명된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첫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제사를 드린 이후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이시며 하나님 앞에서 불을 보내어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을 받으셨다는 표시로 태워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로 성막 안에 있는 의식들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될 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제사를 드려야 하는 날에 그 불을 드려야할 것을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을 망각하고 다른 곳에서 다른 불을 가지고 향단을 피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답과 아비후를 불에 태우셨습니다. 바로 눈 앞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도 그 불을 잊고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이만큼이나 애매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생각나게 하려 한 사도 베드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애매한 기억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시키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맡기실 임무에 적절한 능력을 함께 더하여 주시거나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여 주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배신했기 때문에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읽었던 베드로후서의 저자인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행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전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 3년 동안 동거동락하시며 복음을 가르치시고 복음 전하는 것을 실습시키시고 다른 여러가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순간,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께 배웠던 것을 다시금 기억하여 예수님의 사도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욱 힘을 얻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를 때에 생각하셨던 그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 사도가 이제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닫고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받아보는 성도들이 이미 진리에 서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계속 그 곳에 서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진리가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약함을 절실히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성도들을 위하여 진리가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생각나게 하려고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읽어본 말씀에 아주 명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바로 16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잊지 말고 기억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받아보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잊지 않고 기억나도록 하기 위하여 두 가지 근거를 들며 설명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 확실하고 그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첫번째 근거 : 변화산 사건

첫번째 근거는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로 꼽히는 세 명의 그룹에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세 명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고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소리를 직접 귀에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아들이라고 부른 사실을 베드로 사도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만 받으셔야 하는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께 주신 것은 예수님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받으실 존귀와 영광을 함께 받으실 만한 존귀하신 하나님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고 영광스럽게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일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두번째 근거 : 확실한 예언의 말씀

두번째 근거는 확실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변화산 사건보다 예언이 더 확실하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같이 정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본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겠냐만은 베드로 사도는 예언의 말씀이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사건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언의 말씀이 없다면, 베드로 사도는 자기 눈 앞에 펼쳐진 일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인지 파악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한 기억력과 의지는 변화산 사건을 왜곡시켰을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자기 눈 앞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신 것을 잊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자기 눈 앞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예수님을 높히셨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변화산 사건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 또한 예언의 말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마지막 때에 다시 강림하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고 읽기도 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특별한 것 같지 않아 보이고 흔하디 흔한 성경책이지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경의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기록하게 하시고 어디에다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잘 알려지도록 계시,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사로이 성경을 풀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다 펼쳐 놓으시고 읽게하셨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성경에 관련된 책을 읽기도 하고 성경을 여러 번 읽기도 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깊게 묵상,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오늘 읽었던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사로이 성경을 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사로이 성경을 풀다라는 말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성경 말씀에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사사기나 사무엘상하 같은 성경이 멋진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져도 하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사사로이 자기마음대로 이해하고 자기 삶에 적용한다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풀 수 있는 권위있는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 입니다.

교회는 성경 해석 공동체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성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입니다. 같은 뜻과 목적으로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라는 자신의 편지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한 사람에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교회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함께 받은 자들, 편지를 받는 자들을 소개할 때에 분명히 복수를 사용합니다. 교회는 성경을 풀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함께 이야기하는 공동체 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공동체 입니다. 그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데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직분자를 세우셔서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생활원리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종일 생각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확실한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히 성경이 기준이 됩니다. 특별한 경험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성경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중요한만큼 교회도 중요합니다. 성경과 교회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SFC 강령 중 생활 원리를 외우시고 계실 겁니다.

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이 원리가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원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 원리를 품고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이 나타나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로운 믿음을 품고 살아갈 줄 믿습니다. 그런 복을 누리시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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