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절-11절
1절 :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절 :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절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절 :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시뢰할 것이 있는 줄을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절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절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제목 : 가장 고상한 지식
서론 : 대적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강조합니다. 그 근거로 첫째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을 가르쳤습니다. 둘째는 바울 자신이 빌립보 교회에 가르친 것을 기억하며 구원을 이루길 이야기 합니다. 셋째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빌립보 교회가 마땅히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제 끝으로 대적자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는 편지의 본문 부분이 끝이나게 됩니다.
복음의 합당한 생활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할례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지 못했고 전해들은 복음을 대적하였기 때문에 자기 신앙 생활이 옳지 못하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신앙을 위해 협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또한 두려워하게 만드는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고 그들로부터 빌립보 교회를 지켜야 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개들을 삼가라 (1절-3절)
이번 단락은 끝으로 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끝으로라는 말은 편지를 끝맺으려고 하는 끝으로가 아니라 편지의 구조 중에 본론 부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는 본론 부분을 마친다는 표시로 끝으로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빌립보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지만 여기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빌립보 교회에게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수고로움이 없다는 말은 귀찮지 않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근심하는 것과 염려하는 것이 있었지만 기뻐하길 원하고 그 기쁨이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길 원한다는 바울의 마음, 더 나아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할 때 삼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가하는 것은 주의하고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삼가해야 할 것은 개와 행악하는 자들과 몸을 상해하는 일입니다. 개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다른 말로 하면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개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진리를 더럽히고 성도들을 미혹시켰습니다. 행악하는 자들도 율법을 지키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실제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나오는 피상적인 것들만 지키길 원했습니다. 할례와 안식일 규례, 절기 같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만 지키고 십계명과 같은 율법의 중심되는 내용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율법은 단지 몸을 상해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행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할례, 하나님의 뜻을 따른 할례가 아니라 단지 몸을 상해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할례와 같은 일에만 집착하여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보다 성령으로 봉사하며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진정한 할례파, 진정한 할례를 행한 자들입니다. 제사나 외적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영적 예배,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진정 봉사하는 자입니다. 예배로 봉사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맡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행위나 할례받은 흔적을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결론적으로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자기의 외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것을 자랑하고 자기를 낮춥니다. 이런 자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참할례를 받은 자들이며 진정한 할례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진정한 할례당이 저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육체의 신뢰할 만한 것 (4절-6절)
빌립보 교회의 할례당들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바울은 할례당들이 주장한 모든 것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 있던 할례당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것은 할례당들이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당들도 못 지킬만한 것을 지키고 더 정결한 자가 된 바울 자신을 소개하고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돌아선 자신의 모습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이 율법 앞에 어떤 흠도 잠을 수 없었던 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말로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아주 우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의 가정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 베냐민 지파에 속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언어와 관습과 생활 방식에 있어서 다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달리 온전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성향 또는 소속을 말하는 것인데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이었으며 자신도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교파였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장 잘 알고 그것을 잘 외우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열심은 교회를 핍박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핍박하고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한 당연한 일이며 나사렛 이단을 파멸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전혀 흠잡을 때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도 전혀 죄가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자신의 육체적인 그리고 외적인 조건들을 자랑할 만한 흠없는 자, 온전한 자였습니다.
다 해로 여길 뿐더러 (7절-9절)
바울은 자신의 온전함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자기의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해라는 말은 손실, 손해라는 말입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것 같은 육체도 손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해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여겨진다는 것은 실제로는 득이 될 때도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학식과 출신과 흠 없음으로 쉽게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자신의 온전함에 기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무익하고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한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고상하다는 말은 뛰어나다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어떤 정보의 한 뭉텅이를 머리로 알고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서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 이 앎의 관계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고 탁월하며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면 바울은 자기가 평생토록 쌓아올린 육체의 자랑거리들을 다 해로 여길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좀 더 나아가 자기 육체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것을 잃어버려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더 좋고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가치있는 일 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가지는 의로 연결됩니다. 이 의는 구원을 받는 의, 새생명을 받는 의를 말합니다. 이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것입니다. 율법에서 난 의는 자기 노력으로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아 스스로 획득하는 의 입니다. 하지만 이 의는 참된 새 생명을 주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의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가 주어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만한 의, 구원 받을 만한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결국 믿음이라는 우리의 공로, 우리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공로도 우리의 행위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 수단입니다. 은혜가 하나님께 흘러나올 때에 우리는 믿음이라는 파이프가 있어야 우리의 매마른 곳을 적시는 은혜가 됩니다.
그리스도에 참여함 (10절-11절)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그 부활의 권능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까지 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과 고난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고난을 받은 후에야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은 그저 고난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부활의 권능을 바라보도록 할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난도 감수하고 그 고난에 참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보다는 고난에 중점을 두고 말합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빌립보 교회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일에도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며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부활의 권능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 고상한 지식
바울은 다시 한 번 빌립보 교회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한 뒤 할례당들의 만행을 지적하고 진정한 할례당이 누구인지, 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지식의 한 뭉텅이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 그와 같이 사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삶은 참된 기쁨이 가득한 삶입니다. 부활이 약속된 영광의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대적자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이 삶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시고 기쁘게 만듭니다. 이 은혜와 기쁨의 삶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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