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교회 :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는 특이하게도 갈라디아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 중에 갈라디아 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인은 유럽 대륙의 원주민 중에 켈트족을 뜻하며 동쪽에 거주하는 켈트족을 구분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세운 갈라디아 인들은 지금의 터키 중부 내륙 지역에 살았습니다.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 지역 근방 입니다.
원래 켈트족들은 유럽 대륙 쪽에 살았지만 갈라디아 인들만 특별히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원전 280년 비두니아 왕 니코네데스 왕이 2만명의 켈트인들을 마게도냐와 데살리아에서 용병으로 불렀습니다. 용병의 의무가 끝난 뒤에도 갈라디아 인들은 계속 터키 남부 지방에 눌러 살았습니다. 그렇게 터키 남부 지방에서 살고 있다가 버가모의 아타루스 1세에게 패배하여 브루기아 북쪽 구석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70년에 버가모 왕국이 로마에 바쳐지게 되면서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25년에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정식으로 로마에 속주로 포함시킵니다. 당시 갈라디아인들은 동쪽에서부터 타비움, 앙키라, 페시누스를 중심으로 자기 부족에 따라 세 개 지역으로 나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보낼 때에 이 세 도시에 있는 성도들과 그 외에 작은 마을로 흩어져 있는 성도 모두를 대상으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을 것 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의 도시 앙키라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숭배하던 곳이 었습니다. 이를 황제 숭배라고 부릅니다. 그곳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성한 행적을 기리는 비문이 있었는데, 라틴어 원문과 헬라어 역본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얼마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소중히 생각하며 그에 대한 것을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황제 숭배 의식은 제국 주민에게 의무였습니다. 지역에 따라 황제 숭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도가 달랐지만,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제국 주민은 반역죄를 물어 처벌하였습니다. 처벌은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로마 제국의 주민으로 살기를 거부한 자이기 때문에 처벌은 일상 생활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만큼 가혹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공인하는 종교에 한해서는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처벌을 면제해주었는데 그 중에 유대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처벌 받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핍박 당하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 인들은 주위의 동양계 인종들과 다르게 유럽의 원주민인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갈라디아 인들은 그리스어 말고도 자신들의 켈트어를 일상 생활이 사용하였고 루구스 라고 하는 켈트 족의 신을 섬겼습니다. 루구스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와 동일시 되었습니다. 또한 브루기아 지방의 신도 받아들였는데 특히, 키벨레 신을 섬겼습니다. 키벨레는 아나톨리아라고 불리는 터키 중부 지방의 여신 입니다. 키벨레 신을 섬기는 의식은 매우 기묘한 음악과 역동적인 춤을 동반하여 사람을 최면에 가까운 상태까지 만들었습니다. 아프로디테와 마찬가지로 키벨레를 섬기는 의식은 매우 성적으로 타락했으며, 더욱이 키벨레를 섬기기 위해 제사장이 되려는 남자는 키벨레가 사랑했던 인간 남자 아티스를 따라 거세를 해야 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매우 키벨레를 섬기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갈리가 키벨레를 섬기는 거세한 남사제를 뜻하는 말로도 쓰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앞에서 종교적인 부분을 이야기 할 때부터 알아보았겠지만, 감정적이고 열정적이어서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항상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새로운 소식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철학을 좋아하는 그리스인들 보다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외부의 소식들과 새로운 일들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이 종교일 경우 다른 일을 제쳐 두고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떤 철학자를 본다면 자석에 철이 달라붙듯이 철학자의 외투에 달라붙어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쫓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 사람들의 특징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안디옥 교회를 출발하여 1차 전도 여행 때 터키 남부 비시디아 속주에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고 아시아 속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아시아 속주로 가는 길을 막으셔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인들이 살던 곳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살던 곳은 지중해와 떨어진 내륙 지방이고 높은 산악 지방이었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의 도시보다는 도시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다양한 사람이 모이지는 못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비슷한 성향의 갈라디아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다시 3차 전도여행 때에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한 번 더 방문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것에 쉽게 관심을 가지며 종교에 대한 열정을 가득 품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매우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아시아 속주로 떠나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에,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일이 사도 바울에게 알려지자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처음 전했던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복음이라 생각하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의 마음을 빼았았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와 바울 사도가 관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의 열 두 사도와 바울 사도와의 관계를 부정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온 자기들이 전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구원 받는 자,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할례를 꼭 받아야 하고 율법에 따른 절기들을 지켜서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갈리디아 교회 성도들은 거짓 교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준 복음이 부족하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섬기던 키벨레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너무나 점잖아 보였을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절기를 지킬 때에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내가 제대로 복음을 믿고 있구나 하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적합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한 황제 숭배를 거부할 때 받을 수도 있는 각종 불이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유대교를 섬기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에베소에서 혹은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들었습니다. 바울은 급히 편지를 써서 갈라디아 교회에게 다시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권면합니다. 그 편지가 성경에도 포함된 갈라디아서 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저버리고 배반할 위험에 직면한 교회들이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오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이후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갈라디아 지역의 중심 지역인 앙키라를 방문하여 설교하였고 사도 바울의 제자인 크레시스가 교회를 맡았습니다. 3세기 경에는 데오도르, 앙키라의 플라톤, 앙키라의 클레멘트 등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끝까지 지킨 많은 순교자가 나온 교회가 되었습니다. 현재 앙키라 교회는 그리스-터키 전쟁의 결과로 시행된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이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육체의 모양 추구하는 것, 인간의 열심이 구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경건한 모습과 생활이 더 교회 생활에 적합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경건한 모습과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생활이 구원 받는 것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유한한 인간이 이룬 일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따르는 삶이 구원 받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르침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될 수도 소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질 복음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시 위한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주어집니다.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기에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구원을 베푸실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은 구원 받은 자가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을 어떤 근거도 없는 것을 깨닫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더욱 의지하게 만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 교회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