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4일 월요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4장 8절 - 11절 / 21.05.25)

요나 4장 8절 - 11절

8절 :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절 :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절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제목 :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서론 : 문맥과 배경


요나는 니느웨 성을 빠져 나와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다시 범죄하여 니느웨가 멸망 당할 것을 기대하며 동쪽에서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을 위해서 부름 받았지만 니느웨 성 백성들에게 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그를 햇빛에 보호하셨다가 밤새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말라버리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박넝쿨에 대해서 요나가 화가 난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요나는 초막을 지었지만 초막으로는 뜨거운 햇빛과 동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요나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더위에 지쳐갔고 하나님께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선지자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말씀을 찬찬히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끝까지 전하시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본론 1: 스스로 죽기를 구하다 (8절)

 

요나는 절망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니느웨 성 동편에서 니느웨를 향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며 초막을 지었습니다. 초막을 지은 이후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니느웨 동편에 있는 요나를 응원하시는 듯 하였습니다. 요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하루밤 사이에 .박넝쿨이 말라버리고 강렬한 햇빛과 뜨거운 동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철회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나는 끝없이 절망하고 맙니다. 폭풍 속에서도, 물고기 뱃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였지만 박넝쿨이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가 다 사라지는 듯한 허무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을 시작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하였던 모든 기적과 은혜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반 달라지지 않으신 것만 같았습니다. 자신을 바다 속에 던져 넣으시고 물고기 뱃속에서 완전한 단절을 경험하게 하시며, 새롭게 다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던 요나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선지자는 죽기를 청합니다.


지금 요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는 처음에 했던 반항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요나의 불성실함을 아셨고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성을 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본론 2 : 성내는 것이 옳으냐 (9절)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나와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던 요나에게 했던 말 그대로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점은 요나가 처음 성내었을 때에는 니느웨 성으로 인하여 매우 싫어하고 성내었지만, 지금은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인해서 성낼 때와는 다르게 직접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고 말입니다. 요나의 극명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니느웨를 위해서 죽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만 박넝쿨로 인하여 죽는 일은 괜찮다는 이야기 입니다.


요나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박넝쿨이 하루 만에 없어짐으로 인해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되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이루시지도 않으시며, 폭풍과 물고기에게서 보호하신 그 능력이 햇빛과 뜨거운 동풍에서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완전한 배신감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 자격을 포기하고서도 도망쳤던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돌아온 것은 이루지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과 뜨거운 햇빛과 동풍에 보호받지 못하는 불행한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시며 요나가 박넝쿨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라고 여긴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박넝쿨을 시들게 할 때에 요나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할 것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요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셨습니다. 요나가 하룻밤에 나서 하룻밤에 시들어 버린 박넝쿨에 마음을 두었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니느웨에 마음을 두셨는지를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본론 3 : 니느웨를 아낀다 (10-11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로 요나에게 대답하십니다. 여호와는 애굽에 종으로 잡혀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에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이름입니다. 모세 전에도 여호와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출애굽 이후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모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과격한 대답에 여호와로 대답하십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자신과 전혀 상관 없었던 어쩌면 일평생에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는 박넝쿨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라고 생각하고 박넝쿨을 사랑하였습니다. 정말 요나는 박넝쿨을 위해서 수고도 하지 않았고 씨를 심어 재배하지도 않았습니다. 박넝쿨을 그저 스스로 자라서, 물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박넝쿨을 자라게 하셨지만 하룻밤에 말라버린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요나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박넝쿨을 아꼈듯이, 여호와께서는 자기 능력으로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돌보신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아꼈던 것보다 더 많이 아끼셨습니다. 특히, 니느웨 성 안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십이만여 명이나 있었고 가축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끼지 않겠느냐 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눈물이 흐르지 않겠느냐 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아끼시길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아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기로 한 자신의 돌이키실 때에 사람과 같이 전혀 아품 없이 돌이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셔서 죄를 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가운데 자기 죄를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은 남아 있습니다. 이 형벌은 돌아온 자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주시고자 하시는 정의롭고 고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에 니느웨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율법도 선지자도 없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니느웨가 회개하여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내리시기로 한 벌을 자신에게 내리시며 고통스러워 하시며 니느웨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의 마음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요나서를 기록하여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져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하였습니다..죄 가운데 있던 자들이 돌이킬 때에 하나님께서는 대신 고통 받아주시며 그들을 품어주십니다. 니느웨 백성도 그랬지만,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성실하고 반역만 일삼던 선지자를 끝내 참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후대에까지 전하는 선지자로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아온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 고통 받으시는 모습을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 날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이 끝이 날때까지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께서 유한하고 한계 많은 우리의 몸을 입으시고 당하신 고통입니다. 어떤 사람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온전히 당하시고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게 죄에 합당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용서를 부활을 통해서 완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주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눈물 흘려 주시며 우리가 좌우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길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렇게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이 사랑 안에 있음을 감사하며 이 사랑을 요나 선지자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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