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9장 17절
17절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제목 : 주님이 갚아주십니다
서론 :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들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율법과 같이 강제성을 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세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일반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원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우리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의도하신 행복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도 잠언이 기록된 배경이나 목적, 그 안에 담긴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 선행을 갚으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의 말씀은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찰하고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기록하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통상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면 불쌍히 여김 받은 가난한 자를 통해서 그 선행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듯한 보상을 받는 것을 관찰하였다, 경험하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의 경험과 관찰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 율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만드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는 각자 가진 성격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독특한 성품과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창조세계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성격을 가지셨고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 알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사용하여 자신의 성품과 성격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지혜로운 자들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본론1 : 가난한 자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가난한 자와 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 그리고 그들을 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을 관찰하였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대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라는 말은 물질적으로 궁핍하여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고 가난한 자를 위한 법들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형편에 맞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게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비둘기, 밀가루까지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추수할 때에는 곡식을 거두다가 흘린 이삭을 줍지 말고 가난한 자들이 주워서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고 밭의 모퉁이를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양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 칠 년째 되는 해마다 밭을 그대로 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난한 이방인 종으로 있었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잊지 않길 원하셨고, 이 마음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와 법을 만들어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그 관심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지길 원하셨으며, 가난한 자를 돌보며 배려하는 일 가운데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뜻을 담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특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에게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고 공정한 재판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세를 낼 때에는 부자라고 해서 많이 내게 하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적게 내지 말고 정해진 값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으셨지만, 가난한 자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동등하게 대하실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론2 : 불쌍히 여기는 자
가난한 자 또한 동일하고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일은 가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를 구분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동등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큰 짐을 처음부터 없애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평생 가난한 자를 책임질 수 없는 한계가 분명히 있고, 잠시, 한 순간 짧은 기간을 도와준다고 해서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도 가난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만한 방법도 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 가운데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마음으로만 그렇게 여긴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꾸어드리고 여호와께서 갚으신다는 표현을 볼 때에, 금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힘을 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이 가난한 자로 하여금 가난을 이겨내거나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아 주시며, 그들의 음성을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가운데에서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시고 계십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주인공, 주된 대상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자신의 빈궁한 처지와 배고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들을 교훈하여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론3 :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 대한 기준은 불분명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어떤 사람이 가난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서 그 기준으로 어떤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기준을 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야 절대적 빈곤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최저 생계비 만큼 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빈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옛날 고대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에는 절대적 빈곤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 자기보다 끼니를 덜 먹는 사람 정도로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는 이유는 가난한 자가 어떤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제비 뽑아 주신 땅을 터전으로 삼아 그 지파와 가족끼리 사는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 가운데에서는 결코 가난한 자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누가 더 가진 사람도 없고 누가 덜 가진 사람도 없이 자신과 가족의 필요에 따라 나눠진 몫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고 생활하던 그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 안에서 누구 하나만 가난하거나 풍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한 양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한 양식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과 상대방 보다 내가 더 낫다는 교만함이 불균형을 만들었습니다. 욕심 많고 교만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서부터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잠언 22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이런 상황을 표현합니다.
16절 :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가난은 이익에 눈이 먼 욕심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학대하는 과정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가난은 결국 일그러진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저주입니다. 자기 이익에 눈이 먼 욕심과 교만이 만들어내는 고통입니다. 가난이 인간의 일그러진 죄성 가운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마음은 가난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죄로 인하여 완전히 일그러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가난한 자에게 베풉니다. 이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죄 가운데 빠져서 일그러져 버린 죄성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함을 불쌍히 여기는 일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나님 자신에게 꾸어주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 갚아주시는 여호와
지금까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는 잠언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가난은 일그러진 인간의 죄성으로 비롯된 저주 입니다. 이 저주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불쌍히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꾸어주는 일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또한 이 꾸어준 것을 갚아주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도우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단순한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깨닫고 영화롭고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이야기 입니다.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거룩한지 구분할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을 더욱 닮는 길을 걷도록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일그러진 죄성 가운데 비참한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더욱 닮아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 말씀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찬양 :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죄 가운데 고통 받고 학대 받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기를 저 하늘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무한한 자신의 존재를 유한한 인간의 몸에 우겨 넣으시고 자기 갈 길도 몰라 방황하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며 못 걷는 사람이 걷게 하시며, 나병 환자에게 깨끗함을 주시고, 귀 먹은 사람이 듣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가난한 자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이었고 예수님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자 구원자라고 드러내시는 표적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또한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비참함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 가운데는 죄로 인한 비참함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모든 것이 영화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알기를 예수님을 더욱 닮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알고 그것을 불쌍히 여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주님께서 갚아주실 영화롭고 복된 삶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 복된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