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장 1절 - 11절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제목 : 사람의 열심과 하나님의 법
[서론] 1만 시간의 법칙?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아웃 라이어 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느 분야든지 1만 시간 이상 연습한 사람이 그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한 동안 이 1만 시간의 법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동기부여 강의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1만 시간의 법칙은 말콤 글래드웰이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의 논문을 읽고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은 베를린 음악학교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연구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20살 이전에 1만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알아내었습니다. 다만 이 사실은 1만 시간과 전문가 사이의 어떤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베를린 음악학교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20살 이전 연습했던 시간 총합이 평균 1만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콤이 오해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넘어 앤더스 에릭슨이 말하고자 정말로 말하고자 한 내용은 자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적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과 같이 많은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연습해야 하는데, 혼자서 연습하고, 적절한 연습과 휴식 사이클을 정하고,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 연습하며, 약점을 중점으로 연습하고 정확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열심으로 많은 시간 투자하며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을 지키며 연습해야 의도된 성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만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결국 자기 열심이 앞서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실패담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함께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론] 다윗과 웃사의 잘못된 열심
이 이야기는 다윗 왕 때 일어난 일이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사무엘상이 시작할 때, 하나님의 궤는 실로에 있는 성막에 있었습니다. 실로의 대제사장은 엘리였고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 역할을 하며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보기 좋게 패배하였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진영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가지고 오길 계획하였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계획은 실행되어서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가 충만하게 되었고, 큰 소리를 질렀는데, 땅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것을 매우 두렵게 생각하였고 이 전쟁이 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참패였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진영 중에 언약궤를 빼앗았고 그를 지키던 엘리의 아들들도 죽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블레셋의 신전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옛날 지중해 근처 근동 사람들은 패배한 민족의 신을 자기 신전에 두어 자기가 섬기는 신을 수종 들게 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보다 약한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종 들라고 넣어둔 언약궤 앞에 오히려 블레셋의 신 다곤이 엎드리고, 일으켜 세워두었더니 다음날에는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 위에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가 여호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대로 살지 않고 편리하게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힘을 빌리려 한 이스라엘에 대한 처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을 굴복시킨 언약궤를 다른 블레셋의 도시로 옮겼습니다.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이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일인지, 이 언약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제사장과 점술가를 이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수레를 끌어본 적 없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그 암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시험해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이기 때문에 한 마리만 방향을 틀어도 수레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목숨을 건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들의 방법으로 속건제를 드리고 두 암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맡겼습니다. 아직까지 완전한 확신은 없었지만, 두 암소가 정확히 한 방향으로 향해 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방향은 블레셋 방향이 아닌 이스라엘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레가 언제 돌이킬지 아니면 두 암소의 방향이 맞지 않아 수레가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은 숨죽이며 암소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암소가 끄는 수레는 정확히 벧세메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마을로 향했고, 벧세메스에서 소동이 있은 후, 언약궤는 기럇 여아림이라는 성에 보관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기럇 여아림에 보관된 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 동안 사울 왕이 즉위했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주변 나라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쟁을 치르느라 언약궤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 접경 지역인 기럇 여아림에 보관된 언약궤가 다른 민족에게 다시 빼앗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고 다윗이 왕이 되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를 정립하였을 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다윗 성을 짓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기럇 여아림에 있는 언약궤가 생각이 났고,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삼만 명의 군사를 뽑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해서 삼 만 명의 군사를 뽑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대략 500-600만 정도로 였다고 예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5천 만에 50만 명을 현역병으로 가집니다. 대략 인구의 10% 정도가 현역으로 병력을 운영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비율을 생각하면서, 다윗이 뽑은 삼 만명을 생각해본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서 현역으로 활용 가능한 병력을 모두 투입했다고 해도 맞습니다. 다윗은 국경을 지키고, 언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올지 모르는 이방 나라들의 위협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뽑은 군사 3 만명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기럇 여아림으로 갔습니다. 성경에는 바알레유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바알레유다 지역의 기럇여아림이라는 성읍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 이 작전에 대부분의 국방력이 투입되었듯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다윗 왕의 행렬도 영예롭고 화려한 행렬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새롭게 만든 수레에 실었고,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있던 아비나답의 후손인 웃사와 아효가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를 가지고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행렬을 지어 나아갔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다시 성으로 들어서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수레를 끌던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세 오경을 읽어 본 신실한 신자라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해서 어렴풋이 나마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언약궤를 옮기고 내리며, 성막 안에 넣고 빼는 방법을 일일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언약궤를 옮기고 내리는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분하신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레위인으로 구성된 제사장 입니다. 하지만 다윗 왕이 언약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수레가 사용되었고 소가 그 수레를 끌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언약궤를 운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나름의 노력은 하였습니다. 언약궤를 싣는 수레는 특별히 새로 만든 수레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오랫동안 언약궤를 지켰던 아비나답의 아들들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보관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3 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동원하고, 자신과 자신의 신하들까지도 동원하여 언약궤를 정중하게 모시고 언약궤를 모시는 고귀한 행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 나름의 노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서있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수레에 실려 있는 언약궤가 수레에 떨어져 부서질까봐 자기 손을 들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드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보시고 웃사를 치시고 그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웃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열심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어떻게 옮겨야 할지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생각과 믿음은 그 행렬에서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던 웃사를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웃사는 옛날 아버지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가 들어오던 그 때를 기억하고 다윗 왕과 함께 수레와 수레를 끌 소를 준비했습니다. 또,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수레 위에 있는 언약궤가 부서질까 보호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이 많으신 것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자기 손으로 보호하려고 한 잘못된 열심입니다. 웃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적국 블레셋 땅에서도 언약궤를 온전히 보전하여 그들 스스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나 능력이 많으시고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웃사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자 자기가 잘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성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관한다는 그 생각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몰라서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고 무한하신 분이시기에 어느 한 곳에 지정하여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단지 자기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히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그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성막과 언약궤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과 언약궤를 보며 우리 민족과 특별한 언약 관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이 다윗 성을 지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에 모셔 놓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며 괴로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아는 신실한 신자로서 다윗의 고민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웃사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을 때, 다윗 입장은 골리앗과 사울의 손에서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 수많은 이방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시고 적으로 돌리신다는 사실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 경험했던 모든 은혜와 사랑이 나의 잘못으로 모두 부정되는 듯한 괴로움과 두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군사 3만명을 동원한 모든 작전을 포기합니다.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율법책을 펴놓고 우리가 잘못했고 다른 방법을 하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신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민감했던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와 잘못에 대해서도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일은 군사 작전이나 국가 운영과 같은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했습니다.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며, 어쩌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얻었던 이름처럼 친구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다윗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움직이고, 자신이 직접 지휘했던 언약궤 운반 작전을 물립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근처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되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것을 잃었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얻었습니다. 다윗이 준비했던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셨고 그가 가졌던 방법은 잘못 되었지만 선한 의도와 뜻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도망치듯 놔두고 떠나버렸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이 두려워 했던 것과 같이 다윗의 잘못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트린 것이 아닌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그 사실을 전해 들을 때에 그의 기쁨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올바른 열심
지금까지 다윗의 실패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의 열심은 특별한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대로 행한 열심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목적이나 의도 없이 1만 시간 연습한다고 해서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가가 될 수 없듯이 다윗의 열심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례와 법도에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웃사의 죽음 이후 매우 두려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어쩌면 사울 왕처럼 자신도 버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윗 왕처럼 두려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왕에게도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부어주셔서 알려주셨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기뻐하겠다고 하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 받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려운 죄인에게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알아주시고 그 사랑을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열심, 웃사의 열심은 그 법과 규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과는 전혀 빗나간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스스로 온전함을 지키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시고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두려움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다 알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로 일그러졌던 생각과 의도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죄에 대한 민감하였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민감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람들 아래로 두는 왕으로 살았지만, 철저히 하나님을 위에 두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듯 하지만, 말씀이 얼마나 달콤하고 좋은지 그리고 죄인에게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노래했습니다. 그런 다윗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의도대로 살아내는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위대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은혜를 믿고 우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려 다윗의 마음을 알아주신 것 같이 우리의 마음도 우리 아버지께서 알아주실 것입니다.
강도사님, 이 말씀 청년부에서 해주셔서 고마워요..
답글삭제앞으로 강도사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가시는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많은 사랑 받아 더 행복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무더위 가운데 몸과 마음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