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미혹당하는 약한 자들을 위한 편지 -기독교 강요 1권, 3권 21장을 읽고

I. 서   론
 중고등학생 시절은 태어날 때부터 교회 출석하던 아이들은 신앙에 대한 고민들이 많이 늘어나는 시기이다. 특히, 불신 친구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들이 신앙을 가진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10여년 넘게 교회에 출석하면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과연 하나님은 계시기는 한 걸까? 하는 신앙의 기초적인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불신 친구들도 간식을 준다고 하거나 재미있다고 교회에 데리고 올 수 없다. 오히려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점점 믿는 학생들은 자신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을 숨기기까지도 한다.

  내가 자란 경상남도 지역은 한 반에 35명 정도 있다고 하면 교회 다니는 친구가 한 명이나 두 명도 있을까 말까한 곳이라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모두들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불신앙적인 질문들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던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았던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왜 이 세상에는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지 않고 지구 한 구석에는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고,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답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내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진짜로 있다고 전제하고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다고 전제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하면 어떤 쉬운 말도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어 했고 듣기 싫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믿을 수 없는 전제를 가지고 반박을 하니 답이 없다고 무시해버리기 일수였다. 그런 가운데 중고등부실에 있는 책장에서 기독교강요 책을 꺼내 읽었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나는 국문혼용으로 번역된 옛날 책을 읽을 생각을 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나, 그 만큼 내가 믿어왔고 또한 믿고 있는 이 신앙에 대한 궁금증과 의혹들을 풀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다 이해가 되지 않고 무슨 말인지도 몰라서 지금은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1권을 다시 읽으며 신앙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1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어떻게 도달 할 수 있는지? 그 지식은 인간의 지각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지? 인간의 지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게 하는 최상의 안내자인가? 성경의 내용은 믿을 만한 내용인가? 성경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그 창조한 세상을 어떻게 섭리로 운행하시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왜 불의한 자들을 가만히 놔두시는가? 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다른 사색이나 관조의 방법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칼빈의 의견을 논증을 한다. 비록 16세기 기독교 왕국 유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종교개혁이라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이단들과 철학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격을 받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찾으려 애썼던 칼빈의 모습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인주의, 종교다원주의,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공격받는 21세기 대한민국 교회에게도 많은 가르침과 갈 길을 제시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본 보고서는 본론의 첫 번째 부분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1권의 구성과 중심 내용에 대하여 다루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제 1권과 예정론의 각 장별 요약 및 평가를 서술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간단히 요약하고, 칼빈의 신관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II. 본   론

  1.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1권의 구성과 중심 내용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1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별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주제로 총 다섯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제 1장에서 제 5장까지는 하나님의 피조물과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고, 제 6장에서 제 10장까지는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성경은 하나님의 대한 오해를 해결하는 유일하고 참된 계시임을 말한다. 제 11장에서 제 13장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한다. 제 14장에서 제 15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성부 하나님이 창조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한다. 제 16장에서 제 18장까지는 창조 세계를 양육하시고 유지하기 위해 섭리로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불경한 자까지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까지 부정함이 없이 순결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또한 우리는 섭리의 한 부분으로 제 3권 21장에서 다루는 예정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포함시킬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을 따라 중요한 교리들을 설명한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되는 창조는 성부 하나님만의 사역일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포함한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합작품이다. 따라서 제 1권의 중심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의 설명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헛된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다만 삼위 하나님께서 협력하여 이루신 창조의 사역과 창조 세계를 양육하시고 유지하기 위한 섭리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더욱 집중한다. 이것은 제 1권의 중심 내용은 바로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각 장별 요약 및 평가

    A. 제 1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 연결의 본질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곧바로 하나님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하여 생각이 옮아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한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야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선하신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지하게 사모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만함이 타고나서 우리 자신이 언제나 의롭고,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쉽다. 완전 그 자체로 보였던 내 자신은 하나님의 순결하심에 비추어 볼 때,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을 오히려 틀린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끼고 완전히 압도당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비참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회개가 없으면,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도 없다. 감사가 없다면 그에 대한 사랑도 없다. 우리는 철저히 부패하여 그리고 교만하여서 받은 것 없이는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교만하다. 나에 대해서 알지라도 플라톤은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데아를 생각하였다. 공자는 인과 의가 이루어지는 정치체제를 생각했다. 인간의 교만을 해결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B. 제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를 아는 지식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어떤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와 하나님에게 어떤 것이 유익이 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양육하시며, 우리에게 온갖 복을 베푸신다. 그분만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그분 이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한다. 그에게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결합된 경건한 삶을 살아야한다. 그 삶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가 있어야하고, 하나님에게서 모든 선을 찾기를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에 된 것으로 감사해야한다. 또한 하나님을 악을 벌하는 분이시며 경건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의 말은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 앞에 감사 밖에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구체적으로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나타난다. 이것이 경건한 삶이다. 비참한 나를 발견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C. 제 3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심겨졌음
 하나님은 친히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사고력을 모든 사람들 속에 심어 놓으셨다. 그래서 그의 뜻에 사람들 자신을 합당하게 드리지 못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 종교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속이고 굴복시키고 착취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의 정신에 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이 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의 속임수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짐승보다 더 월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을 통해서만 사람이 불멸을 사모한다.

 칼빈은 이 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모든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생각하여 어떤 종교든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와 같은 무신론적 종교가 생기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불교도 윤회의 굴레라고 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열반이라고 하는 완전한 신적 경지가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견해가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신이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 완전한 존재를 생각하고 그 존재가 신, 다른 인간, 자연물 등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D. 제 4장 무지에 의해서나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짓눌리거나 더럽혀짐
 인간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타락하였다 그리하여 진정한 경건을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헛된 교만과 완고함이 인간을 지배한다. 또한 하나님을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을 제단하고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꿈꾸어 지어낸다. 이런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존재를 없애버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를 빼앗아버리고 그를 하늘 속에 가두려 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더라도 그의 권능을 부인함으로 신의 영광을 자신이 가지려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 자신의 모습으로 계셔서 이리저리 바뀌는 유령이나 환영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거짓된 환상을 경배하고 찬송한다. 억지 신에 대하 억지스런 두려움은 시시한 방법들과 하찮은 것들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환심을 사려 애쓴다. 그러나 부패한 종교의 씨앗은 지극히 악한 열매 밖에 맺지 못한다.

 미신과 맹신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함에서 나타난다. 인간에게도 감동주지 못할 행동으로 자신이 섬기는 신이 감동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함은 다른 측면에서 이신론을 만들어낸다. 나와는 상관없는 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진다. 고행과 수행을 통해 완전한 존재로 각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함과 완고함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E. 제 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주의 창조와 그 지속적인 운행에서 분명히 드러남
 하나님은 창조세계 속에서도 날마다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 언제든지 우리의 시선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작은 영광의 불빛이라도 보게 된다. 우주의 세련된 구조가 하나님을 보게 한다. 우주와 천체 그리고 인간의 몸인 신체는 그 지으신 이의 탁월하심을 선포하기에 완벽하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완벽함 때문에 자연 그 자체를 우주만물을 지은 존재로 섬긴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저급한 질서와 하나님을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을 있게 하신 그분은 반드시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하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신에 대한 어렴풋한 생각을 하고 나서 육체의 경솔하고 악한 상상에 빠진다. 수많은 신을 만들어 내거나 차라리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사람들의 공통적인 믿음에만 근거하여 세워진 종교는 결코 순전할 수 없다.

    F. 제 6장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성경이라는 안내자와 교사가 필요함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라는 빛을 주시어 자신에게로 올바로 이끌어 주신다. 다른 온갖 거짓 신들과 구별해 주는 확실한 증표들을 배우는 것도 성경이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의 길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올바른 지식도 순종에서 나온다. 하늘의 교리가 잊혀지거나 왜곡되고 부패하게 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 두었고, 인간의 연약함과 무기력함 때문에 말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종교의 씨앗도 자연 만물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정확한 지식은 성경 속에 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칼빈은 명확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서 전하신 그대로 기록되었다는 확신과 기록되어진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경으로 받아드려졌는 확신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주장이다.

    G. 제 7장 성령의 증거가 성경의 권위의 확립에 필수적임.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논리는 사악한 거짓임.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의 기록 속에 보존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성경의 권위가 인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였고 교회도 성경의 가르침의 권위 위에서 세워졌다. 교회는 진리를 향하여 접근하게 해주는 출발점의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어떤 믿을 만한 것도 없다.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완전한 증거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얻어진다. 우리의 판단과 지성을 성령의 증거에 예속시켜야 한다.

 칼빈은 교회가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교회가 진리 그 자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인 것이다. 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따라야 한다. 교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경에 교회의 판단과 지성을 예속시켰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H. 제 8장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의 이성의 범주 내에서도 충분히 입증됨
 성경이 기록된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주제의 장엄함이 성경의 가치를 보여준다. 숭고한 비밀들이 비천하고 초라한 말들로 표현되었다. 그 자체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진리임을 나타낸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품을 수 없을 만한 사상들이 가득 차 있다. 성경은 오래된 책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모세는 자신이 기록한 모세 오경에서 자신이 속한 부족, 가족, 심지어 자신까지도 낮춘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자임을 증명한다. 또한 수많은 거룩한 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성경의 교리를 지켰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만이 성경을 확신하는 최고의 증거라고 말한다. 이 장에서 밝히는 증거들은 이차적인 증거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차적인 증거가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정경론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신앙의 선배들이 연구해놓은 것을 배우는 것도 하나님의 좋은 믿음을 얻기 위한 연단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Y. 제 9장 성경을 버리고 계시들을 쫓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시킴
 성경이 아닌 다른 길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가 있다. 그러나 사도들과 초대 교회 다른 신자들은 성령에게 조명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멸시하게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저자이시며 성경과 다르게 변하실 수 없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계시하신 말씀 그대로 언제나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또한 그 말씀을 효력 있게 확증하게 하심으로 그의 일을 완성하고자 하신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그 뜻을 밝히 알게 하시는 역사이다. 나의 상황과 여건을 보시고 말씀이 내 상황과 여건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신다. 이것 또한 계시인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나를 살피시고 돌보신다.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이다.

    J. 제 10장 성경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제시하여 모든 아방 신들을 물리치고 모든 미신을 교정함.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은 그저 허망하고 과장된 사색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창조세계 속에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난다. 피조물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의 신들은 거부되어야 한다. 유일한 어떤 신을 본성을 통해 느꼈다 할지라도 성경에 나타난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다.

 우리의 부패되고 오염된 지각은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성경만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가 일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통해 불신자들의 미신을 교정해야 한다.

    K. 제 11장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이며, 우상을 세우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임.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우상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가르친다. 자기를 위해 만들어내는 신의 관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표현한다면 성경에 반하는 거짓말로 그 속에 나타내고자 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부패하고 만다. 율법의 말씀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계시가 한 민족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식의 논리에 불과하다. 형상들은 무지한 자들에게는 책과도 같다는 말이 있지만 성경은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말한다. 교부들도 조각상의 조잡함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이 멸시 당할 수 있음을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과 대담함은 우리 본성 자체가 영구한 우상의 제조 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교회를 가르치는 자들이 우상에게 그 직분을 맡겨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가톨릭의 형상을 이용한 예배와 예식들을 비판하였다. 7장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교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여기서도 드러낸다. 교회의 결정은 온전히 성경에 근거한 결정일 때에만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 세계 곳곳에서 성경 구석구석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굳이 교제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L. 제 12장 하나님은 우상과 전적으로 구별되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완전한 존귀를 드려야함.
 신성에 속한 모든 것을 오진 하나님께만 한정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할 존귀가 박탈당하고 예배가 더럽혀진다. 하나님의 주위에 다른 신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기능들을 분배하도록 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돌려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교회에서는 성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예배와 봉사라는 구분으로 가톨릭은 성인 숭배를 정당화 시킨다.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무수한 다른 존재들에게 분배하는 것은 이런 오류에 빠져들게 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역할을 분배하는 우상숭배를 다루는 것은 삼위일체는 이와 같은 우상숭배와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세 위격의 사역이 다른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분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본질이신 하나님과 신으로 위장한 성인 숭배를 극명한 대비가 돋보인다.

    M. 제 13장 성경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며 그 안에 삼위가 계심을 가르침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가 우리를 잣대로 하나님을 측정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를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분이며, 분명히 삼위로 계심을 바라본다. 성자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능력과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나신 바 되셨고, 영원 전부터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신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자신의 신성을 밝히신다. 성령께서도 창조에 개입하셨으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 신적인 위엄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성령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시는데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분임을 볼 때 우리는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세례로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알고 성경에 나타난 각 위격의 사역으로서 구별되심을 안다. 성자는 동일한 성령을 성부와 함께 공유하시므로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신 것이다. 그러나 각 위마다 고유한 특성들이 있어, 그 안에서 하나의 순서가 있다. 그 순서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조심스럽게 이끌어간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은 말하지 않고 오직 성경이 말하는 부분만 말하는 지혜를 보인다. 이와 같은 자세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가져야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신앙의 선배들인 교부들의 의견도 세심하게 살피며 그들의 올바른 성경해석을 따르고자한다. 교부들의 의견 대부분은 이단들과의 논쟁 중에 나온 것들이다. 칼빈은 이단들에 쌓여 고통 받는 그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고대에 비슷한 괴로움을 당한 신앙의 선배들을 소개하며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N. 제 14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명확한 표지들로써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 신들과 구별지음.
 하나님께서 창조역사를 성경에 명확히 드러내신 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여 세상의 창조자이자 조성자로 제시한 바로 그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가르쳐주실 목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것 이외에 상상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엿새 동안의 창조는 인간을 위해 육일 동안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천사조차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천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와 같은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마귀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마귀도 실제로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만 활동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조물주의 위대하심을 묵상하게 하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부족함 없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을 이방 신들과 구분하는 표지로서 창조를 말한다. 또한 이것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는 특징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천사와 마귀와 같은 영적세계도 함께 창조하셨다. 칼빈 시대의 로마교회처럼 천사와 마귀를 두려워할 이유도 경배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현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적 존재들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신비주의와 샤머니즘이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거짓 신이 아닌 영적 존재들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치고 전하여야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O. 제 15장 사람의 창조된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원시의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을 아는 것은 타락 이후의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해주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창조되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이 아름다울지라도 교만할 거리가 없음을 명심해야한다. 인간의 정신에 부여된 고귀한 재능들은 인간의 정신에 무엇인가 신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한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는 두 단어가 서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다른 모든 생물들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탁월함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마니교처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흘러내려온 것이 아니라 무에서부터 창조되어 존재한 것으로 믿어야 한다. 사람은 창조된 순진한 상태에서 원하기만 하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능력이 있었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에서 사람의 창조는 구별된다. 육일 동안의 창조가 사람의 창조를 위해서 이루어진 준비 작업이라고 칼빈은 말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했지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통제하실 자유를 포기하시는 자유를 보이신다. 창조 자체가 성부 하나님의 비우심을 말한다.

    P. 제 16장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그의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그의 섭리로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심
 창조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창조사실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에게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그것이 만물을 지탱시킨다는 식의 생각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영원한 통치자이시고 보존자이시라는 결론 내려야 한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야말로 지극히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볼 수 있는 일도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이신론을 경계한다. 그의 생각은 1세기 지나서 발표되는 뉴턴의 운동법칙으로부터 시작하는 기계론적 사고를 경계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유지하시고 이끌어 가시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어제와 같은 모습일 수 없고, 수학 공식으로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머리 속의 상상일 뿐이고 허망한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Q. 제 17장 섭리 교리의 올바른 적용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섭리의 전 과정에 나타나지만 사건들의 원인들이 감추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계획 속에 선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이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선하신 목적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들의 악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구실로 모든 범죄를 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계획하고 계획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을 거스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삶의 한계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우리에게 그 삶을 맡겨서 행하게 하신다. 또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서 하나님께서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목적과 의도를 분별하기 보다는 이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집중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기에 우리가 순탄한 중에 있을 때나 환난 중에 있을 때나 어떤 순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선하신 뜻을 가지고 모든 일을 진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이며, 끝내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R. 제 18장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심판을 시행하시며, 동시에 스스로 부정함이 없이 순결을 유지하심.
 마귀와 악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하심과 허용하심을 서로 구별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 일을 행하는 장본인이심을 노골적으로 선언하신다. 사탄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명령들을 받는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친히 주도하실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은 하나님의 보응을 시행하는 사역자에 불과하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공의로운 보응을 주도하시는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뜻은 한 가지이다. 전능자로서 악에서 선을 이루실 수 없으시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이 행해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통하여 그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지만, 그 악인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용납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비록 악인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악인은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묻지마 범죄나 사이코패스와 같은 문제들을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즐거움이나 분풀이를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인지 생각해봐야될 문제이다.

   S. 제 21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제 3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드리실 사람들과 멸망으로 내어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예정하셨다. 선택된 사람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가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근거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하고 무흠하면서도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이것은 멸망에 내어주신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는 근거로 삼는다.

 칼빈은 유기된 자들에 대한 불신자들의 오해를 잘 설명하였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의 입장에서 성경 이야기를 통해 유기된 자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로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더욱 확신할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신자들은 자신이 유기된 자인가 하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신자들 또한 불신 가족들이 유기된 것을 걱정하며 지낼 이유가 없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함께 구원받은 백성 되길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다.

III. 결   론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창조 세계와 인간 마음에 심겨진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의 무지와 불의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만 올바르고 완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그 중 성부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특별히 창조하셨으며, 세상을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는 섭리로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가르친다.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서 이 책을 기록하였다. 로마교회와 다른 이단들에게 미혹당할 위기에 처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미혹들이 있고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미혹들도 있다. 하지만 칼빈은 성도들을 위하여 약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내용이 많을 정도로 신실하게 하늘의 교리를 서술하였다.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뜻이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성경으로 진리를 설명하고자 시도하여 자신의 주장이 성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칼빈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성경 말씀은 성령께서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16세기의 칼빈이나 21세기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진리인 것이다. 그 진리를 붙잡고 씨름하여서 칼빈이 16세기의 로마교회와 이단들의 미혹에서 성도들을 건져내려 노력하였듯이, 우리도 포스트모더니즘과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외모지상주의 등 온갖 성경적이지 않은 가치 속에 미혹되어 살아가는 성도들을 건져내려 노력하여야 한다. 칼빈은 성령의 조명하심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도 성령의 조명하심을 바라고 기도하면서 성경과 씨름하며 세상의 미혹을 받는 성도들에게 구명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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