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설교자와 설교의 필요조건 “존 스토트의 설교”를 읽고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특히 ‘알파고’로 알려진 인공지능의 발전이 4차 산업혁명의 연료로 4차 산업혁명은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다. 제46차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710만 개의 직업이 사라지리라 전망한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직업은 다름 아닌 법조계 직업들이다. 먼 미래나 10년 후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개발된 인공지능들도 ‘딥러닝’이라는 알고리즘을 통하여 과거의 수많은 판례들과 법조문들을 분석하고 학습할 수 있다. 그것을 기반으로 비교적 판결에 모호함이 없는 형사재판에 한하여 피고인에 대해 유·무죄를 판단하고 죄질에 알맞은 형량과 벌금을 책정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유·무죄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인공지능이라면 다른 어떤 것도 못 할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수많은 설교문들과 성경을 분석하고 교회당에 앉아있는 청중의 유형을 적절히 정의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알맞은 설교문을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존 스토트가 걱정하였던 그런 시대적 상황보다 더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을지 모른다. 이 책 “존 스토트의 설교”는 설교가 현대 사회에서 마주치는 도전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하고 그 도전에 응전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설교의 기초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도전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그동안 유교 전통의 질서가 살아있고 그 전통에 따라 배워온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는 권위라는 말에 알르레기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런 반응을 볼 수 있었던 가장 최근의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이다. 세월호 구조에 대해서 한국 내의 최고의 전문가들과 헌신 된 사람들에 의해 구조작업과 사고 원인 조사를 하였지만 많은 사람은 국가 기관의 발표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더 믿었고 따랐다. 전문가에 대한 권위가 실추되었고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이 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때에 설교자는 청중의 성향과 그들의 신념에 어긋나는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의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청중들은 설교자의 의식 수준에 의문을 던질 것이고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청중들은 설교자 설교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릴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청중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설교자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성경을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교회에 다니면서 쌓아온 인맥과 그 인맥으로 발휘되는 권위를 놓치는 것이 아까워서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권위를 무시하나 권위에 집착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중에 요구대로 청중의 필요대로 설교하는 것이다. 이로써 설교자의 권위는 청중이 부여하는 것이 되고 설교자는 그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버린다.

 우리는 강단의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비롯된 참된 위로와 평안이 포함된 복음이 선포되어야할 강단에서 세속적 평안과 부요와 번영이 복음인양 둔갑하여 설교의 제목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된다. 하지만 저자는 설교자의 권위는 오로지 성경 말씀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성경을 강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본문을 맨 처음 받아든 수신자들이 겪었을 변화를 지금 현대의 청중들에게도 똑같이 경험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청중이 부여한 권위를 거부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강단에 서라는 말이다. 청중은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설교자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설교자의 가슴을 치기 때문이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설교자에게 임하였듯이 청중들에게도 임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임하신다. 그러나 이런 가슴을 치는 설교는 감정적이지만은 않다.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이유도 우리가 죄인의 습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패한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선 이성이고 그것을 아파하고 통회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이성적이기도 하며 감성적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인격을 자극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한다.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게 한다. 그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권위이다. 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부터 나온다.

 성경을 강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을 강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수준에서 머물러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가 필요하다. 저자는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문법적, 역사적, 문화적인 연구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연구는 완벽할 수가 없다. 역사적 연구를 시작할 때에도 역사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탐구영역이기 때문에 절대적 사실이 없고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은 한 유물의 발견유무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인 백제 하면 떠오르는 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발굴되어 한국 고대사와 공예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 중국과 일본의 공예 기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기존의 사실이 한 유물의 발견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터키, 이집트 등지에서는 활발한 고고학 발굴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 중 사해 문서의 발견은 정경 형성과 이스라엘의 종교관을 다시 써야 할 정도의 발견이었다. 역사는 그 연구에 따라 변하고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연구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한계는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설교자로 하여금 자신의 말로 설교하게 되는 위험을 내포한다. 우리는 완벽히 성경 말씀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의 가장 이해하기 쉬운 본문이라도 우리는 곡해하기 쉽다. 우리가 연구를 위해서 한 단어, 한 구절에 집중하다가 보면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놓치고 만다. 성경을 강해하는 데는 필요 적절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런 연구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성경을 설교해야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청중을 전제로한 행위이다. 설교에 있어서 청중은 빼놓을 수 없기에 청중을 완전히 배제한 설교는 좋은 설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청중을 이해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설교를 설교자와 청중의 조용한 대화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설교는 청중의 상황과 형편 등을 보아서 설교자가 적합한 설교를 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교는 고대 사회나 중세 사회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교회의 출석하는 성도들의 직업은 거의 농부였고 그들의 형편과 생활 수준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일부 귀족들과 지주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인 농부들은 교육 수준과 지적 능력이 비슷하여 그들에게 수준을 맞추어 설교하면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고대와 중세 시대는 현대와 비교했을 때 변화가 그렇게 빠르게 일어나는 시대가 아니였다. 그래서 급변하는 사회 정세와 경제 구조 속에서 그것을 파악하고자 설교자들은 허덕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어제의 사회와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자 제품의 경우에도 5년 전만 하더라도 1년 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신제품이 출시되었지만 지금은 3개월 수준으로 신제품과 새로운 기능들이 쏟아지고 있다. 오죽하면 하드웨어의 개발은 거의 정점에 다다랐고 이제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예언 조차도 옛말이 되어버리고 끝없이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술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나누어지면서 청중들의 계층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당장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10년 이내에 사라질 직종이 710만 개에 이른다.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 소리도 나오는 실정이다. 큰 공장을 관리하는데는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있으면 된다고 한다. 개는 공장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그 개를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청중들이 가진 다양한 배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그들의 상황과 형편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대도시화와 개인화는 청중 각각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르고 어떤 범주화 할 수 없이 복잡함을 보여준다. 설교자는 청중의 다수 계층이나 특정 계층을 염두에 두고 설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청중을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한계를 느낀다. 저자는 현대 사회와 청중을 이해하기 위해 독서 모임이나 전문가에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시대의 청중은 어떤 책 한 권, 좋은 강의 한 시간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삶을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자는 청중을 파악하기 위해 개개인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심방하여 그들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목회자인 것이다. 목회의 기초는 자신이 돌보는 양을 아는 것, 성도 개개인을 아는 것이다. 이런 앎 속에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지혜로는 우리가 목회하는 모든 성도들의 상황과 형편을 고려한 설교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성경도 청중도 또한 자기 자신조차 모른채 강단에 올라가 자신이 좋아하는 말만 늘어 놓고 자기 만족에 잠겨 버릴 수 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말과 똑같다.

 성령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바로 설교문 없이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다. 저자는 설교문을 작성하지 않는 것을 설교자의 게으름, 나태함이라 지적한다. 물론 설교자는 설교문에 없는 것도 설교할 수 있다. 저자가 전제하였듯이 설교는 청중과의 조용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만이 말하는데 어떻게 대화가 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언급하였듯이 성령님의 역사가 설교 속에는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는 설교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조명하시어 성경과 청중을 성령님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파악하게 하시고 설교자에게 설교 중에 해야할 말을 알려주신다. 청중에게는 설교자의 설교를 밝히 이해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고 이성과 감성을 포함한 전인적인 인격에서 반응하도록 인도하신다. 한 성령 안에서 설교 사역은 이루어지고 한 성령 안에서 설교는 그 방향과 속도(강함)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극단적으로 흘러간다면 설교 전에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성령님은 분명히 설교가 시작하기 전부터 역사하고 계신다. 그것의 증거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설교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설교가 시작하기 전 부터 설교를 위한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교의 원천부터 그 결과까지 성령님의 사역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문 작성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문에 너무 갇히는 것도 한 극단 중에 하나이다. 저자는 설교문에 대한 두 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설교문을 작성하되 설교하기전 한 장으로 요약하기를 추천한다. 이 방법은 설교자로 하여금 자신이 작성한 설교를 더욱 이해하고 숙지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청중의 조용한 요구에 따라 설교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 할 수 있다. 설교 전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지도 설교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지도 않는 균형잡힌 방법이라 생각한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 힘입어 설교해야한다. 성령님께 힘입어 설교를 작성해야한다.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설교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사역 도구로 쓰임 받는다. 그 옛날 성경 저자들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할 때처럼 성령님께서는 설교자를 사용하신다.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님의 펜이 아니고 인간 저자 즉, 제 이 저자였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스피커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즉 설교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도전에 응전 할 수 있다. 비록 인공지능에게 많은 연구 시간과 많은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 없이는 설교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작성하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강의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한다. 기도와 성경 말씀 읽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이해하고 연구하며, 청중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설교 시간에는 청중과 조용한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 관여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의 사역의 도구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같이 쓰임 받고 버림 당하는 불충한 종이 되지 말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에스라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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