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한 더욱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잘 살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선택일까?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무엇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할까요? 오늘은 로마서 12장 1-2절 통해서 우리 선택의 기준이 되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 윤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도덕적 선택 기준 즉,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에서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법과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알 수 있다.”입니다. 자연법과 양심 모두 인간 내면에서 어떤 것이 도덕적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설명되지만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자연법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양심은 개개인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온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과 자연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인식이라는 것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죄로 인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인식 능력도 일그러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두 번째, “율법(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알 수 있다.”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르게 또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변하지 않으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또한 변하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파악하는 것은 마땅히 그가 친히 주신 율법(성경)의 말씀으로부터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의 요약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가 성경(율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기독교 교리의 기틀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남긴 편지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의 요약이며, 성령님께서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은 모든 교회가 정경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려 졌습니다. 특히,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들 중에서도 가장 기독교의 교리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성경으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기독교 윤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다루고 있고, 12장부터 16장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행해야할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행해야할 일들을 다루기 위해 시작하는 서론 부분입니다. 이 서론 부분은 앞의 1장에서 11장까지의 말씀들을 전제하고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1장에서 11장을 요약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4명의 신학자들의 의견을 따라가면서 본문 말씀을 공부도록 하겠습니다.
각 신학자들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다르게 요약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하나님의 긍휼 행사’라 요약하고 있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은혜 사역’이라 요약하고, 마틴 루터는 ‘죄인이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는가’라 요약하고, 존 칼빈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각 신학자들이 받아드리는 기독교 윤리의 대전제도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이제 각각의 신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신학자는 더글라스 무 입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을 “하나님의 긍휼 행사에 대한 응답”으로 정리합니다. 그 응답의 방법은 바로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 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몸은 바로 우리의 전인격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상과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물이라는 말은 드려지는 전인격이 살아있는 동안에 속된 것과 구별되어 헌신하는 그런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제물이 드려지는 영적 예배는 내면적 외면적 태도가 모두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을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2절은 1절과는 별개의 권면이 아니라 1절의 권면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방법들이라는 말입니다. 처음으로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함으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종이 되지 말라 요구합니다. 다음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는데, 변화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합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닮아가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합당히 여길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더글라스 무는 2절을 통해서 기독교 윤리의 원천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자의 새로워진 마음입니다. 이 새로워진 마음은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셨다는 증거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법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증거 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신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 입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을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은혜사역의 진보 즉, 본성의 지속적 변화와 쇄신”으로 정리합니다. 본성의 지속적인 변화와 쇄신은 자기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몸을 거룩한 용도와 목적에 바치는 것입니다. 먼저 외적 행동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성과 이성을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신성한 성향으로 기울도록 하십니다. 의무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약속에 합당한 길로 이끌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려고 애쓰는데 이 일은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실천하는 것을 명령 받는데 그것은 영적 예배 입니다. 이와 같은 명령을 받기는 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성향으로 기울어져 우리의 기질과 미각이 변화되어 자동적으로 저절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실천하는데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조나단 에드워드는 육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복종하여 본성의 지속적인 변화와 쇄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자동적으로 저절로 하나님의 윤리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신학자는 마틴 루터 입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을 “죄인이 새 사람이 되어 거듭남으로 나오는 선한 행위”로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로 거듭남을 받은 것이지 자신의 선한 행위로 거듭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행위로 인한 의는 거짓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회심의 체험을 받아야 거듭남이 있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신의 지혜와 그 지혜를 주장하는 아집을 뿌리뽑아야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거듭남을 무효화시킬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산 제물입니다. 산 제물은 선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성결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이며,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지만 언제나 회개합니다. 따라서 언제나 의롭게 됩니다. 언제나 되어져 가는 상태인 것입니다. 새롭게 하는 일이 날마다 일어나며 점점 더 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알 수 있는 지점까지 이르게 합니다. 모든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시고 복된 결국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윤리는 회개의 체험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아집을 뿌리뽑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신학자는 존 칼빈 입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우리의 행실”로 정리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도덕 규범을 제시하기 전에 선의 목적을 밝히고 미덕들을 찾아내어 거기로부터 의무들을 도출해 내지만, 바울은 모든 본분들의 토대가 되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을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순종하는 이유는 자발적으로 기쁘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산 제물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던 이전의 생명들은 멸해지고 새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기 위해서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몸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를 뜻하며 우리의 행위들을 실행하는 도구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 지체없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안해낸 모든 예배 방식들을 다버리고 진정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도 의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정서와 행실을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옳고 틀린 것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분별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존 칼빈은 하나님의 윤리는 세상과 같이 온전함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방법대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온전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선택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서 바른 선택을 가르치시는 방식을 다르게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더글라스 무는 새로워진 마음 자체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윤리를 행하도록 한다고 생각하지만, 칼빈과 루터는 끊임없이 회개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윤리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의견을 모두 수용할 수 있습니다. 변화된 양심으로 살아가되 끊임없이 말씀 앞에서 우리를 교정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으되 여전히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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