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원칙이 없는 사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원칙이란 상대적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가 진리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각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진리가 단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적용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자기의 생각이 진리인 것이다. 마치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황도 오늘날의 상황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한 분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들 각자가 믿는 방식은 달랐다. 바리새파는 엄격한 율법을 중시하여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사두개파는 제사와 예전을 율법보다 중요하게 여겨 성전을 중심으로 모였다. 쿰란 공동체와 같은 에세네파는 자신들만의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진 곳으로 숨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칼을 빼 들었다. 자신들이 섬기는 방식이 옳다하며 아우성치던 시대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였다. 예수님의 등장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분파가 만들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상보훈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다르던 율법을 완성시키시는 말씀이었고, 사두개인들의 제사와 예전을 무너뜨리며, 에세네파의 순결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도전의 말씀이었으며, 열심당의 열심은 폭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교훈의 말씀이었다. 이 글은 산상보훈의 첫 부분인 팔복과 세상의 소금 비유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율법에 대해서 밝히시는 부분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의미 그대로를 포착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적용하는 글이다.
산상보훈의 첫 시작은 팔복으로부터 시작된다. 팔복은 핍박받는 자에 대한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복 받는 대상들은 모두 고통 중에 있고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오로지 상처 받은 몸뚱이만 가진 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신다. 약속이 아니라 선언하신다. 핍박과 고난과 슬픔과 배고픔과 목마름 중에 있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선포하신다. 예수님 자신의 고난을 미리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설교의 첫 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자기소개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본을 먼저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팔복을 선언하신다. 핍박을 받아 복을 받기로 선언된 자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예수님 앞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 그 자체가 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핍박과 고난과 슬픔과 배고픔과 목마름 중에 있는 청중들에게 예수님이 복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복음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팔복의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성도의 착한 행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핍박을 당하던 자들에게 핍박 주던 그들에게 착한 행실로 대답하라는 말씀이다. 하늘의 복이신 예수님의 행실이 그러했다.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은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그 기도는 우리에게 착한 행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다. 그 착한 행실이란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도 유지하려고도 오시지 않으셨다. 율법을 완성시키려 오신 것이다. 그 율법의 완성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을 재해석하여 따라야 함을 말씀한다. 율법은 제사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사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되었고, 시민법은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난 뒤 부터 율법의 진리와 내용이 우리의 표준이 된다. 도덕법은 우리 시대에도 마땅히 지켜질 수 있고 또한 지켜져야할 규범이다.
산상보훈의 시작은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의 선포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섬겨야할 내용이 뒤이어 나온다. 우리는 산상보훈을 이상으로 받아드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헛된 말을 하시려고 저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니다. 오직 우리에게 진리와 구원을 전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아버지의 선하신 뜻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힘입어 행할 수 있음을 알고 기도함으로 말씀을 행하고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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