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칼빈의 십계명 이해와 사회윤리”을 읽고


“십계 (1953년)”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모세의 일생을 다루면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대작 사극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엄청난 수의 엑스트라와 고대 이집트를 완벽하게 재현해낸 무대미술은 그 당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줄 정도였고, 현재의 관객들도 만족할 만한 수준을 보인다.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영화는 1,200만 달러로 제작되었는데, 전 세계 총 수익은 1억 2,2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십계”는 인기가 많았는데, 개봉한 지 50여년이나 지난 지금도 크리스마스나 기독교 관련 큰 행사 (2014년 교황 방한 등) 가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방송사들은 특집 영화로 편성되어 반영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 십계’라는 등식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많이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상황은 다른 일반 사회인들과는 다르게 십계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보인다. 한 일례로 찬송가나 성경책 표지 뒷면에 항상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이 붙어있지만 주일 공예배 때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만 사용하지 십계명을  읽는 교회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 글 “칼빈의 십계명 이해와 사회윤리”는 한국교회에서 인식하고 있는 십계명의 가치를 제고하고, 칼빈이 십계명을 이해한 원칙과 그 원칙에서 비롯된 사회관과 사회윤리를 설명한 다음 연구해야할 개혁주의 윤리학과 실천해야할 교회의 과제들을 제시하는 글이다.

 십계명은 초대교회 이후부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비해서 많이 가르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 이후로 교리를 문답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십계명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회복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십계명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네바 교리문답”, “오경 주석”, “신명기 설교” 등에서 십계명에 대해 자세히 가르쳤다. 칼빈 이후 개혁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서와 교리 문답서를 통해서 칼빈의 자세를 본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십계명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십계명을 다시 소홀히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배 시간에 십계명을 낭독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도들은 십계명을 외우고 다니지 않는다. 암송하지는 못하고 대신에 각 계명의 주요한 내용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십계명의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지속한다. 왜냐하면 좀처럼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의미를 모르니, 삶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설교 시간에 듣는 파편적인 지식만 머리에 있을 뿐이다. 파편적인 지식은 파편적인 신앙을 만든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볼 때, 성도는 왜곡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말은 두 가지다. 첫 번째, 하나님께 실망하여 믿음의 자리에서 떠난다. 두 번째,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의 파편들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여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에 매인 미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십계명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거나, 미신적인 삶을 살도록 놔두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칼빈은 십계명을 서문과 열 가지 계명으로 구분하였다. 서문의 내용은 애굽 땅에서 노예 처지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하셔서 다시금 시내산 앞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하는 주체가 되셨고 그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인 것을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반대로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을 노예로 삼는 애굽에 속한 자들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이미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십계명은 구원받은 이 후의 삶 즉,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으로의 삶에 꼭 필요한 규범인 것이다. 그래서 이 규범을 행할 때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를 마음 속에 가지고 행해야한다. 또한 규범을 행하는 것 자체가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규범을 어긴다고 하여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계명의 목적은 형벌을 내리기 위한 잘잘못을 따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율법의 제 3 기능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십계명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칼빈은 십계명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어떤 전통과 논리보다 우선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가장 분명히 한다. 그리고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첫째,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해석해야하고 둘째, 표현되어 있는 명령 그 안의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해야하고 셋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리들의 가장 모범된 예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과 사역들은 십계명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과 부합되고 그것들을 실현하는 삶이었고 완성시키는 삶이였다. 예수님 당시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지키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칭찬받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기에는 그것은 위선이었고, 외식이었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이 여기셨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왜곡되고 편협하게 지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보란 듯이 병자들을 안식일 날,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료하신다. 그것 때문에 미움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만, 그것조차도 이미 주신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야한다. 칼빈은 십계명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중에서 황금률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원리라고 설명한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이웃이 자신을 위해 행해주길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행한 한 행동으로 인하여 나타는 결과는 나와 이웃에게 형평하다는 것이다. 이 형평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적용된다고 칼빈은 가르친다. 불법 즉, 십계명을 어기는 행동들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이웃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낼 때 십계명을 지키는 행동들로 충만한 세상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형평이 이루어진 세상에는 나와 이웃이 똑같은 결과를 얻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다르고 필요한 종류가 같더라도 필요한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약한 자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고 강한 자에게는 많은 것 전부가 필요하지는 않다. 약한 자를 위하여 긍휼의 값을 더하여 많은 것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형평으로 십계명을 해석하였고 그것을 성도 개인의 삶에 관하여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적 이슈와 연관지어서 설교하고 강해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칼빈이 이 시대에 살았다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정유라씨에 대한 이화여대 특혜에 대해서 제 8 계명을 적용하고, 남의 물건에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세나 부를 사용해서 가치 있는 것을 차지하고는 그것을 가질 만한 노력을 한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은 안 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십계명을 성도들의 규범으로 제한시키지 않았다. 믿지 않는 자들도 따라야할 사회윤리 헌장으로 이해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와 정부가 분리되어있고 서로 다른 역할과 의무를 감당하고 있지만 사회 전반에 형평의 문제가 생길 때에 합력해야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정부 아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정부도 교회 아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와 정부는 서로에게 함께 속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평에서 벗어난 약한 자를 함께 돌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형평에 벗어난 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그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범인 십계명으로부터 형평이 지켜져야 하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의 종류와 그 범위를 규정해야한다. 또한 새로 발생되는 사회 문제들로부터 이 문제가 십계명의 몇 계명과 관련이 있는지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 처방을 교회에서 잘 가르쳐 성도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공론화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그것이 제도화되어 실제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제도화에 있어서도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야한다. 약한 자를 돌보는 복지 정책만이 아니라 약한 자들 스스로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발효된 “부정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 법’이다. 비록 최초로 입안된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지만, 누구든지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할리우드 상업 영화인 ‘맨 프롬 어스 (2007년 개봉)’에서는 십계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I can sum up the ten commandments in ten words: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믿지 않는 사람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가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죽으면 ‘하지 말라 (Don’t)’고 말하는 신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시지 않으셨다. 창세기 1장에서 첫 인간을 지으시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으며, 창세기 9장에서도 처음 시대의 인간들의 범죄를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여야하고 또 움직여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위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한다. 그 하나님의 뜻이 바로 십계명이다. 주일 공예배 때마다 십계명을 낭독하고 설교시간에 십계명을 사회적 차원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서 성도로 하여금 십계명의 온전한 뜻을 깨닫고 마음에 새겨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형평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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