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성형" 을 읽고
성형수술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쌍꺼풀 수술 정도는 고등학교 졸업 선물 정도로 생각한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성형수술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어떤 남성 연예인은 자신이 연예인에 걸맞는 끼가 없다면서 자신의 성형수술 사실을 고백하고는 성형한 연예인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이후로 2010년대에 들어서는 공공연한 연예인들의 성형고백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그 자신들도 성형수술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전체 인구 대 성형외과 의사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한국을 아는 거의 모든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은 반드시 어딘가 성형했을 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글 “성형”은 성형수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교회의 윤리를 어떻게 확립해야 할지 대한 글이다.
성형수술은 1, 2차 세계대전 중 참전 군인들이 화상이나 부상에 신체와 얼굴의 모양이 상했을 때, 원래의 모양을 찾아주기 위해서 생겨난 의술이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최근에는 미용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트렌스젠더 수술과 더불어 변환된 성별에 맞게 얼굴과 신체를 성형하는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모를 통해 다른 자질을 판단하는 소위 ‘관상’과 같은 문화가 예부터 있어서 외모는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에도 직무와 관련 없이 관상이 좋은 사람, 외모가 호감인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 나아가 외모가 호감인 사람일수록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의 상황 속에서 성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교육과정 중에서도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를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의 도덕이나 바른 생활 교과서에 사용된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음흉하고 어딘가 꺼림칙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법을 어기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대비는 어린 나이 학생들의 뇌리에 박혀 바꿀 수 없는 선입관을 심어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게 되는 사춘기에 이르면 자기 외모에 대한 불만족이 생겨나고 그 불만족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성형수술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은 더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욕구 즉, 성형에 대한 욕구를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의 틀로 살펴보고 있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중에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어떤 것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품이나 뛰어난 지능, 기술 등을 가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욕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으로서 이 욕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기호적 표현에 의해서 조작되고 강화된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S라인의 몸매, 크고 매력적인 눈매, 오뚝한 코와 가녀린 턱선을 가진 여성을 좋아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한 여성의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모의 여성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만인의 이상형도 거대 자본과 미디어 권력에 의해서 변경되고 만다. 왜냐하면, 거대 자본들이 대중들의 지속적인 소비를 위해서 유행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은 이런 다른 사람들의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지 않는지 끊임없이 자문자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지속 될 때에 자신의 주체성이 강화되고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라캉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였고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삶을 살아간다면, 결론은 죄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대한민국 내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흙수저’, ‘N포 세대’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매년 청년 실업률은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취업하기 위해서는 ‘스펙 9종 세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경험, 자격증, 공모전 입상 경력, 인턴 경력, 사회봉사 경험 그리고 외모 이다. 이 중 외모는 다른 ‘스펙’과 다르게 인위적으로 만들어 질 수 없고 타고나는 것이지만, 다이어트와 성형수술과 같은 각종 의학적 방법 등을 통하여 ‘관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비슷한 스펙일 경우 외모를 우선 기준으로 하여 뽑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에 외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외모는 돈을 벌게 해주는 수단 그 자체이거나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요구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형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더 나은 외모를 위한 성형이 주를 이루어왔지만 이제부터는 더 나은 돈벌이, 직장을 얻기 위한 투자로 변질되어간다.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가르쳐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형을 하고 안하고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에서는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라는 것을 만들어 직무상 필요 없는 스펙을 보지 않고, 지원자의 직무능력만을 평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있다. 교회도 이와 같은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도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교회당 건축이다. 아름다운 교회당의 모습에 기존 신자들의 마음에는 좋을 수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부족하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교회당을 볼 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교회당을 건축할 때 최대한 아름다움에 기준을 두기 보다는 실효성과 실용성에 기준을 두어 건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예배에 참석하거나 인도하는 신자들의 옷차림이다. 화려하고 비싼 한복을 입고 안내를 서는 신자는 보기 좋고 정성이 가득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교회의 어떤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입었다는 자존심 싸움이 있을 지도 모른다. 화려한 넥타이나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과시적으로 입고 다니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는 옷보다 말끔하고 단정한 옷을 입도록 권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철저히 멀리해야할 생각이다.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될 자세이다.
성형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욕망을 채우고 즐기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흐르는 외모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외형만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형만으로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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