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각 개개인을 위한 복음과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을 포함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하여 나타났는데, 예수님은 각 사람의 장애와 귀신 들림을 치유하셨지만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을 다시금 보동 사람으로 정상인으로 돌리는 사역이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며 고대하는 개인으로 살아 내야하는 행동 덕목을 제시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 즉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교육시키신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구약시대에도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인간 공동체의 도덕과 윤리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맺은 언약이기도 하였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나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현대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정치윤리 ; 네 가지 페러다임”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에만 몰두한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를 향한 복음, 즉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게 되면서 다양하게 반응하는 복음주의 내의 정치윤리를 다루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에 세계에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이 호황 이면에는 국제적으로 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냉전이라 이름 붙여진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긴장 상황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약소국 내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이 국내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젊은 층의 반전운동이 지속되고 있었고 이들 히피라고 불리던 일부 반전 운동가들의 자유분방함은 경건주의적이고 성과 속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던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도덕적 해이와 가치관 혼란이 지배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미국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의 진보적인 성향의 교회에서는 진작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일이다. 그 일부로 예수 운동 (Jesus Movement)을 들 수 있다. 히피들의 음악인 락앤롤에 반대하여 갈보리 교회를 주축으로 현대 기독교 음악 (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모체가 되는 지저스락을 작곡하고 보급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시카고 선언문”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것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왜냐하면 각자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나가야할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달랐고,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같더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크게 구분되는 부분은 미국 문화와 사회에 대한 기대와 인식, 정부의 기능과 한계를 설정하는 기준, 무력 사용과 전쟁에 대한 적극성, 경제체제 안에서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범위와 기준,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개혁하는 방법론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런 움직임은 파울러 (R.Fowler) 교수와 처릴로와 뎀스터 (Cerillo. Jr. & Dempster) 교수는 네 가지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현대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정치윤리 ; 네 가지 페러다임”은 처릴로와 뎀스터 교수의 의견을 따라 이를 네 가지 입장으로 나누었고 이는 각각 보수적 복음주의 (Evangelical Conservative), 진보적 복음주의 (Evangelical Liberal), 급진적 복음주의 (Evangelical Radical), 그리고 근본주의 신우파 (Fundamentalist New Right) 이다.
보수적 복음주의는 미국이 다원주의와 도덕적 타락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을 회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회복의 방법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회를 향한 복음과 사회적 의무를 배워서 그 원리대로 살아갈 때에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관계들이 변화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역할은 최소화 되어야한다. 정부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다른 일반 시민들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행하지 않도록 형벌을 내리는 기능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필요한 복지를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원리대로 살아가고 그것에 감동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전도된다 할지라도 사회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즉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이상 사회는 성경적 교훈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의 유명한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oral Society-A Study in Ethics and Politics)”는 이러한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었다. 개인들의 도덕성의 합이 사회 전체의 도덕성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수적 복음주의는 교회로 하여금 성과 속을 나누는 잘못된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적 사회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미국이 다양한 종교와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한 창조를 믿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구조와 제도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선하게 될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현실정치에 참여하여서 기독교적 가치관과 성경적 교훈을 정책에 반영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공공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현실정치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그리스도인이 정한 정책들이 전혀 기독교적 가치와 성경적 교훈을 담지도 않거나 설령 담아내었다 할지라도 너무나 편협하게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되고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지켜지지 않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불합리한 정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가이드라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복음주의는 미국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을 방불케하는 이교도 국가라 정의하고 정부를 신뢰하지 않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정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보적 복음주의와는 다르게 더욱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의 제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형성함으로 보수적 복음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가치와 성경적 교훈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바로 그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과 단절되게 만드는 결과만 있을 뿐이다. 마치 1960년대 이전 교회와 세상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고 세상 정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던 이전의 행태를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그대로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예수님과 제자들과 같이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야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득권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보다 더 좋은 교훈으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본주의 신우파는 미국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나라라고 믿는다. 그래서 미국을 변화시킬 방법은 미국 초기에 신실했던 대통령들과 같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 성경적 교훈으로 살아내는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서 기독교적 가치를 지닌 법과 제도로 선민인 미국 국민들이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와 교육의 개혁도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의 기능이 커지는 것은 반대한다. 과도한 권력은 전제 정치를 야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삼분의 일을 지방 정부나 비정부단체에게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주요 기능은 바로 복지기능이다. 이 입장은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미국사랑에서 출발한 입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민족이 마지막 날에 선택받은 남겨진 선민이다. 혹은 성경에서 갑자기 사라진 단 지파의 후손이 한민족이다. 라고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와 같은 것이다. 또한 미국사랑의 목표가 같은 어떤 단체와의 협려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 입장의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약점은 결국 근본주의 신우파의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변질되는 인상을 준다.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행태를 많이 보여 왔다. 국정교과서 문제, 불법 선거운동, 사립학교법 등 정치적 보수주의를 신앙으로 포장하여 하나님의 뜻인양 강단에서 선포한다. 이것은 그나마 있던 교회의 영향력을 자기 스스로 깎아내리고 다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할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네 가지 패러다임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목적은 세상의 정치인과 다르다. 세상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 쟁취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정치를 참여한다. 위의 네 가지 입장 중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와 사건에 따라서 네 가지 입장 중 우리가 취해야할 입장을 선택적으로 취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사회는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시는 정의와 평화와는 동떨어진 집단이라 여긴다. 한국 교회는 힘을 모아서 사회에 만연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줄이는데 우선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연한 사고와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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