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 예로 모든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을 고백하고, 최후의 날에 성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고백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날 부터 최후 심판의 날까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은 창조와 종말 사이 시간을 살아가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지 판단하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이 단순히 복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르침과 사역임을 알게 되면서 종말에 이 세상에 오게 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목표로 하는 기독교 윤리학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신학적 흐름은 리처드 마우와 위르겐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종말의 날 위에 서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윤리적 관점을 제안하고 있었다. “종말론과 사회윤리 : 위르겐 몰트만과 리처드 마우의 신학적 정치윤리비교”는 리처드 마우와 위르겐 몰트만의 종말론과 신학윤리를 비교하며 한국교회가 가져야할 종말론에 대한 자세와 사회윤리를 제안하는 글이었다.
종말론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다루는 교리이다. 리처드 마우와 위르겐 몰트만의 사회윤리에 대한 입장이 달랐는데, 그것은 각자의 종말론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창조를 이해하는 입장 차이에서 출발한다. 리처드 마우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선하게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인 창세기 1:28의 내용은 선하게 창조된 세계 위에 선하게 창조된 인간이 선한 문화를 만들고 지켜나가라는 명령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께서 창조역사를 여전히 지속하고 계시며 종말의 때에 완성된다고 이해하였다. 창세기 1장에서 나타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에 맞게 피조물이 창조되었다고 인정하는 표현일 뿐, 피조물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몰트만의 생각은 창세기 1장의 문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창세기 1장은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하여 와우 계속법으로 시제가 계속 완료로 이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문맥으로는 창조를 완성하셨고 더 이상 진행하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창세기 2장 2절이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그의 모든 일 그치고 안식하신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이며,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창조를 받아드리는 입장이 다른 만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도 다르다. 리처드 마우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어느 정도 회복된 세계라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만 저주를 내리신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듯 땅은 아담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그 약속을 이루셨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저주받은 이 땅은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통해 우리 인간의 문화, 정치, 사회 등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며 인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셨던 문화명령을 이루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처드 마우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통을 주고 억압하는 지도자가 리처드 마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신실하게 이행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위르겐 몰트만은 창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현재에도 적용시킨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도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르겐 몰트만의 입장은 리처드 마우의 입장처럼 창조를 선한 창조로 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께서 우리 성도에게 오셨고 성도 안에 내주하셔서 종말에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일부라도 경험하게 하시지만, 이 세상 자체는 인간의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종말 이 후의 세계에 비해서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서 해방되어야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듯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으며 이 고난이 속히 끝나길 고대하고 있다. 위르겐 몰트만의 생각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활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였다. 그 정죄함에는 우상숭배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사회적, 윤리적 타락의 내용도 많았다.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은 공허한 외침일 뿐인가? 예레미야 26장에서는 유다왕 히스기야 시대에 소선지서를 기록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미가 선지자의 말에 백성들은 순종하여 회개함으로 저주를 피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은 현재가 선하지 않은 창조가 진행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제 종말을 대하는 두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자. 리처드 마우는 종말을 이 세상의 최종적인 회복과 성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상 문화와 제도와 구조들은 종말의 때에 완성되고 성화되어 종말의 때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쓰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낙관적으로 인간의 문화를 보게 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의 문화와 제도를 만들고 수정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더 극단적으로 변질된다면 그리스도인이 정한 문화와 제도라면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고수하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와 문화 참여에 있어서 성경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것이고, 또한 만들어질 문화와 구조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반해 위르겐 몰트만은 종말을 이 세상의 완전한 새 창조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것을 모두 부정하고 극복하여서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며 이 소망과 희망은 현재의 문화와 제도를 변혁함으로 적극적인 기다림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종말에 가서는 변혁된 제도와 문화는 선하지 않기에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제도와 문화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노력과 헌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변혁에 대한 의지는 적극적일 수 없고 소극적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하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리처드 마우와 위르겐 몰트만 각자의 종말론에 근거한 사회윤리적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창조-현재-종말에 이르는 관점을 살펴보았고, 그들의 생각이 가지는 약점들도 살펴보았다. 그들의 생각은 각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독일교회와 미국교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에 무엇을 배워서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 타계적인 종말론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을 형성해야한다.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전래되었던 때부터 줄곧 박해와 핍박 속에서 살아왔다. 이런 지치고 힘든 삶은 한국교회의 성도로 하여금 고난과 핍박이 없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나 천당이라는 이름을 한 타계적인 종말론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핍박이 없고 풍요로운 21세기 현재의 한국교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기초적인 종말론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세워나가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망각할 수도 있다. 둘째, 한국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교회가 나서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으로 세상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세상 정권에 아부하는 교회도 일부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죄로 말미암은 불의와 착취, 분쟁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도 될 수도 있고 법적으로 같이 대응해 줄 수도 있고, 시위나 불매 운동과 같은 시민운동과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마침내 이 땅에 임하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선포가 교회의 할 일이며, 하나님 나라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이다.
많은 목사님들이 주일 마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하신다. 하지만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그 종말론적인 신앙에는 우리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적용이 빠져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사회의 시민으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 속에서 어떻게 종말론적인 신앙을 표현하며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물론 이를 받아드리기 위해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알고 믿고 있는 사실을 교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