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7일 금요일

설교문 작성 실습

설교 제목 : 비판, 할 수 밖에 없는 굴레

서  론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하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새 정부가 무척이나 일을 잘한다고 칭찬 일색 입니다. 파격이라는 말이 더 이상 파격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것은 새 정부의 새 일꾼들 입니다.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어떻게 허락을 얻어 내었는지 새 정부의 일꾼들은 너무나도 새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청문회 입니다. 국회 청문회를 통과해야만이 장관이나 국무총리의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청문회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청문회 대상자의 낯뜨거운 잘못을 드러내는 국회위원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국회위원들도 그렇게 청렴해보이지 않고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비판은 당사자에게 아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속으로는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며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는 우리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 갈련지 걱정만 생깁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거룩해야할 공동체, 거룩해야할 너와 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명감에 불타 거룩함이 부족한듯한 형제나 자매에게 쓴소리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청문회에 앉아 있는 국회위원과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여기서 무너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 말씀하시는듯 하지만, 절대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본  론
 첫째, 거룩한 공동체를 위한 비판을 위해서 나 자신부터 비판 받아야 합니다. 5절 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우리는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찾아내어 빼어야 합니다. 들보가 무엇인지 티가 무엇인지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들보와 티의 크기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들보는 집의 지붕을 받칠 정도로 큰 나무 기둥을 뜻합니다. 티는 말 그대로 티끌처럼 작은 것을 말합니다. 둘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잘못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는 그 들보를 빼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커다란 들보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5절에서 볼 수 있듯이 눈에 아무것도 없는 자,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것을 빼어버릴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모습을 정말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이상적인 삶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눈의 들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빼어달라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밝히 보아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공동체를 위한 비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상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 6절 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변화받은 우리는 아무나에게 우리의 밝은 눈을 비추고 티를 때어주려는 노력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지적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거룩한 지혜 입니다. 이런 지혜를 그저 나를 공격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잔소리라 무시하고 천시하는 자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참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거룩한 지혜를 맛보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며 신기해 할 수도 있지만, 구원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맛보고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우리들을 공격하는데 쓰일 수 있다는 의미 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대표적인 사람들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우고 항상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지만, 사도 바울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죄목은 이방인들을 성전으로 인도하였다여 신성모독을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구원의 문을 열어 두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물론 품고 기도하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여야 하겠지만 예수님께 받은 거룩한 지혜를 그들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사도 바울을 감옥에 가둔 것과 같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여 우리의 지혜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거룩한 공동체를 위한 비판을 위해서 서로를 헤아려 주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 2절 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남을 비판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남을 헤아리는 행위가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첫 구절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뒤의 구절들을 같이 살펴본 것과 같이 비판은 신앙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비판이 아니라 헤아림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입니다. 헤아림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거룩한 공동체에 누를 끼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지적 받고 고쳐야한다고 책망받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심령은 이런 힘든 일을 혼자만 지고 가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어김없이 우리 속에서 우리가 받았던 지적과 책망을 고스란히 돌려줍니다. 우리의 습성이 그렇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약한 모습을 아시고 우리에게 비판이 아닌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십니다. 바로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헤아림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헤아림은 서로의 죄와 서로의 더러움과 서로의 미성숙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위로하고 공감하고 그 마음을 고쳐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헤아리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났다가 도중에 도망친 마가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 자신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도망친 것을 기억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도망친 마가 요한을 자신의 아들처럼 품었던 것입니다. 비판하는 자신도 비판 받는 상대방도 모두 연약한 인간임을 알 때에 우리는 서로를 헤아리며 거룩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결   론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공동체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돌아보고 나에게 잘못된 점이 없는가를 살펴야 하고, 비판을 받을 상대방이 받아 들일만한 사람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밣아 비판을 하더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수준은 서로를 헤아려 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안아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인격으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대로 할 수 있는 것부터 내가 제일 하기 쉬운 것 부터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하나 둘씩 늘어 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거룩한 공동체, 천국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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